The term minimalism is also used to describe a trend in design and architecture where in the subject is reduced to its necessary elements. Minimalist design has been highly influenced by Japanese traditional design and architecture. In addition, the work of De Stijl artists is
The term minimalism is also used to describe a trend in design and architecture where in the subject is reduced to its necessary elements. Minimalist design has been highly influenced by Japanese traditional design and architecture. In addition, the work of De Stijl artists is
형식주의 사진의 한국적 수용
- 한정식의 사진 -
현대사진의 제 양상을 고찰해 보면 가장 중요하게 떠오르는 특징이 바로표현기법과 영역의 다양함일 것이다. 미래의 사진에서 그 영역이 더욱 확대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겠지만, 현재의 국면을 보면 전통적인 사진의 관점으로 도저히 사진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표현까지도 당당히 제도의 한 축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표현의 다양성이 곧 하나의 양식 (style)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으며, 현대사진을 과거의 사진과 구별시키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다원주의 등으로 불리우는 이러한 상황은 일정한 지배적인 형식이 있었던 모더니즘의 시대와 확연히 구분된다.
모더니즘 시대의 일면 획일적인 예술에 대한 반성 또는 연장으로 출발한 현대의 예술과 사진은 다양성의 획득이란 측면에서는 확실히 긍정적이다. 그러나 표현기법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예술의 무정부주의적 상황을 만들었고, 예술의 숭고한 정신가치를 저버렸다는 측면에서 무조건 긍정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많은 비판과 극복의 과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의 예술가치가 여전히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실제로 모더니즘 시대의 사진은 외적으로 사진매체를 확고한 예술의 영역으로 안치시켰으며, 사진내적으로는 인간의 감정과 사고를 거의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모든 형식과 제도를 확립시켰다. 이는 비단 외국사진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흔히 들어서 알고 있는 이퀴벌런트(Equivalent)의 사진미학이나 결정적 순간의 미학, 형식주의사진 그리고 도큐멘타리 사진 양식의 확립 등은 크게 보면 바로 모더니즘시대의 산물이었다.
이러한 사진의 제 미학적 가치들이 사진매체의 본질과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비록 그것이 사진에 관련된 메카니즘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이전에 존재했던 다른 어떤 예술의 미학과도 구분된다는 점에서 사진의 본질적 가치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모더니즘 이전의 사진들이 전형적인 낭만주의 회화의 미학을 따르고 있었던 점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로버트 아담스(Robert Adams)가 그의 사진론집 “사진의 미(Beauty in Photography)”에서 말한 형식미의 극대화는 가장 사진적인 미학의 전형으로 매체의 본질에 근접해 있는 미적 가치이다."
오늘날 진행되는 사진예술에 있어 표현기법의 다원성 추구가 다분히 실험적인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모더니즘의 미학적 가치는 여전히 중요한 사진예술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실험이란 항상 실패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전통의 무게란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문화의 한 축이기 때문이다. 사진작업에서 카메라 앞에 놓인 피사체 또는 세계를 좀 더 의미심장하고 세련된 눈으로 보고 이를 잘 묘사하는데서 사진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모더니즘 시대의 대표적인 미학이 바로 형식주의이다. 비록 이것이 모더니즘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사진 자체의 성격과 사진가의 감정이 가장 잘 드러나는 형식이라는 차원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사진예술의 한 방법론이다.
지금까지 서구 모더니즘 예술사조의 산물로서 형식주의 사진의 가치를 거론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나라의 예술사진이 현대화되는 과정에 끼친 영향이 컸다는 사실 때문이다. 사실 192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우리나라의 예술사진은 거의 절대적으로 일본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0년대 이후 등장한 생활주의 리얼리즘 또한 독자적인 미학적 가치라기 보다는 일본사진의 흐름을 일정하게 수용한 사진형식이었다. 물론 당시의 일본사진 역시도서구사진의 영향을 확실하게 받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사진은 일본에 의해 관학풍으로 굴절된 서구 사진의 모서리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에 이르면서 우리나라가 미국문화의 영향권 아래 확실하게 놓이게되고, 우리나라의 사진도 미국의 사진 형식을 직수입하는 단계에 이른다. 이때 몇몇 사진가들이 채용한 사진의 미학이 바로 미국 형식주의 (American Formalism)였다. 이는 창작의 기술적 방법론에서 보면 직설적인 (straight) 방식이고, 추구하는 내용면에서 보면 자연 또는 인공물의 형태로부터 어떤 심미적인 형상을 찾아내 재현함으로써 극적인 시각적 효과를 노리는 미학이다. 미국의 경우 형식주의는 스티글리츠 (Alfred Stieglitz)와 에드워드 웨스턴(Edward Weston)을 거쳐 1950년대 말 마이너 화이트(Minor White)에 와서 완성되었다고 평가되며, 대표적인 현대의 사진방법론으로 많은 나라의 사진가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는 문학, 예술에 있어 무분별한 외국 사조의 수용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많이 접하고 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비판이 마치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는 느낌까지도 받는다. 실제 우리의 문화상황을 고려해 볼 때 꼭 제기되어야 할 문제인 것도 사실이다. 다만 매체의 특성상 외국의 사조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이를 자신의 세계로 충분히 소화시켜 체화한 작가들의 작품까지도 다시한번 무분별하게 비판받는 상황은 무분별한 수용보다 더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외국문화의 수용이 한 나라 문화의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지만 긍정적인 기여를 한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화의 상호 교류가 갖는 장점을 설명하는 것은 사족에 불과하다.
1970년대 우리나라에서 형식주의 사진의 수용은 한국 사진예술의 발전에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많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대다수에게 해당하는 말은 아니겠지만, 당시 몇몇 사진가들에 의해 굴절없이 형식주의 사진이 수용됨으로써 고답적인 한국사진의 정체현상의 고리가 풀리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회화미학의 범주를 따르던 살롱사진과, 다른 한편으로 사진의 기록성과 사실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소위 리얼리즘 사진으로 단순하게 양분된 당시의 한국사진에서 이들의 등장은 사진매체의 예술적 가능성을 넓혀주는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형식주의 사진의 틀을 따르면서도 자신들의 독특한 미의식과 감수성을 내용으로 작품을 만들어 한국사진의 한 형식을 만들어 갔다.
한정식은 바로 형식주의 사진을 수용해서 새로운 한국사진의 형태를 만들었던 가장 대표적인 사진가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가 사진매체를 이해하는 태도는 지극히 순수한 형식주의의 틀에서 출발한다. 뒤에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지만, 철저한 프레임 의식에 근거한 대상 접근이나 담백하리만큼 직설적인 표현기법은 그의 형식주의 사진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말해준다. 그러면서도 한정식의 사진이 만드는 분위기는 서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서정성을 자아낸다. 이는 첫째로그의 소재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대상 자체보다는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구조의 다름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해서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리고 의식구조의 다름은 다름 아닌 그가 가진 한국적 정서이다.
한정식의 사진이 우리에게 한국사진으로 긍정될 수 있는 근거는 각기 상이한 것처럼 보이는 서양적 형식과 한국적 감수성이 조화를 이루면서 생긴 사진의 독특한 분위기 때문이다. 그 분위기의 정체를 정확하게 표현할 언어를 필자는 모르지만, 외국의 사진을 모방할 때 오는 어색한 느낌이 아닌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다가오는 느낌인 것은 확실하다. 필자로서는 이 분위기를 '심상'이라는 말로표현하고 한정식과 같은 세대의 사진가들의 작품을 '심상사진'으로 정의하는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심상이란 마음의 이미지라는 뜻인데, 사진 이미지는 마음이 아닌 대상에서 비롯된 것이며 사진가는 대상에서 받은 느낌을 시각화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영화이론가인 메츠(Christian Metz)의 말을 빌면 이미지란 실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지만 결국 실재하는 어떤 것으로 부터 추출된 것이다.
한정식은 60년대 말 당시 사진가의 등용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던 <동아사진컨테스트>를 통해 사진의 길에 들어섰다. 그 후 사진의 여러가지 측면을 실험하면서 사진가로서의 능력을 쌓았고, 1977년 일본 경에서 가진 그의 첫 번째 개인 전람회에 내건 나무사진 연작을 출발로 자신의 사진세계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 후 몇 차례의 개인 전람회와 잡지 기고를 통해 사진가로서 이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는 그동안 여러 가지 주제의 연작 사진을 발표했는데, '서울', '아파트', '여성론', '나무' 그리고'발'등이 그가 주로 작업한 사진의 대상이었다. 이렇게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진 전반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거의유사하다. 이 말은 결국 한정식의 경우 사진가로서 피사체의 외관에 끌려 다니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시각적 기호에 따라 대상을 자유로이 끌어당기는 능력을 가진 사진가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필자의 생각으로 그의 그러한 사진세계가 가장 잘 드러나는 작업은 나무」와 「발」이 아닌가 한다.
나무」 사진과 「발」사진은 작가 스스로도 전람회를 열고 사진집을 만들었을 만큼 개인적인 의미도 큰 주제이며, 가장 오랜 세월 동안을 걸려 만든 사진들이다. 더구나 이 사진들은 다른 어떤 한정식의사진보다도 형식적인 면과 내용에서 세련되고 정제된 것들이며 그의 사진 방법론과 의식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한정식의 사진과 의식세계를 조망하는데 있어 이두가지 연작사진을 중심으로 삼고자 한다. 전혀 다른 종류의 대상인 나무와발이 그의 사진으로 표현되었을 때 나타나는 최종 이미지의 관련성을 파악하는 것은 비단 그의 사진만이 아닌 사진매체의 본질적 특성을 밝혀주는 한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한정식의 사진에서 우선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단순하리만큼 직설적이고 밀착된 대상에 대한 접근이다. 인간은 두 눈을 갖고 있고 두 눈의 초점을 한군데 모아서 사물을 볼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보고자 하는 대상과일정한 물리적 거리를 유지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필연적인 물리적 거리는 대상과의 일정한 심리적 거리를 수반한다. 따라서 사진을 보는 행위의 연장수단으로 생각하는 대다수의 사진가들에게 카메라와 대상사이의 거리를 좁혀 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정식의 사진이 갖는 강점은 그가 속한 세대의 사진가들 중의 어느 누구보다도 거침없는 대상에 대한 과감한 접근이 시도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과감한 접근은 물론 나무나 발의 일정 부분들이 갖는 형태의 미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부산물이기는 하지만, 그 결과는 작가 스스로도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조형 요소를 발견하는데 이르기도 하며 사물에 대한 새로운 시각적 인식을 가능하게 했다. 한편으로 일상적인 시각의 범주에서 벗어난 사물은 자체의 대상성 또는 사실성을 상실함으로써, 오히려 작가는 자신의 상상력과 감수성 그리고 의식을 삼투시킬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고 있는 것이다.
한정식이 사진의 방법론으로 이용하고 있는 또 하나의 방식은 앞에서 언급했던 스티글리츠에서 시작된 이퀴벌런트의 미학이다. 절제된 프레임을 통해 대상에 접근하는 그는 사진을 보면 프레임의 설치를 통해 대상을 주변으로부터 고립시켜 원래의 대상과 등가의 다른 형태의 미를 추구하는 예술이라는 형식주의의 교리를 완벽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무와 발은 어느 부분이나 대상 자체에 속해있지만 한 부분이 주변으로 부터 독립되어 나무와 발 자체인 동시에 다른 형태와 감정의 요소로 작용한다. 이에 대해서 작가 스스로도 사진집 「나무」-한정식 사진집의 서문에서 그가 찍은 나무의 형체에서 여체를 연상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대상에 대한 극적인 접근과 이를 통한 등가적 가치의 창출을 한정식의 사진방법론으로 보았을 때, 그는 우리나라에서 모더니즘의 형식주의 사진의 원리를 가장 철저하게 수용하는 사진가로 인정 될 수 있다. 하지만 한정식의 사진이 갖는 가치는 이러한 방법론에 있지 않다. 그 보다는 형식을 통해 나타나는 최종 결과물인 사진 이미지의 조형적 가치에 있다. 우리의 사물에 대한 인식은 정확히 말하면 사물 자체가 아닌 사물과 이를 감싸고 있는 주변 요소들과의 관련성이다. 따라서 프레임의 설치를 통해 주변이 배제된 사물은 이미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고 어떤 조형적 가치로 남는다.
작가의 미의식과 형태에 대한 감각의 표출은 결국 최종적인 화면의 조형성을 통해 이루어지며, 여기에서 작품의 개성 또는 국적성의 여부가 가려진다고 할 수 있다. 형식주의 사진 형식의 최대 강점은 바로 그것이 작가가 가진 내면의 또는 외부로 드러나는 의식세계를 적나라하게 체계화시키는 방법론이라는 점이다. 어찌보면 가장 한국적인 감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는 이는 비단 필자만의 견해는 아니며 그를 아는 대부분 사람들의 의견이다. 한정식이 70년대에 체득한 서양의 형식주의의 사진 방법론을 최근의 「발」사진 연작에까지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장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정식의 사진이 한국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자연에 대한 섬세한 시각과 집착이다. 그가 택하는 소재는 가끔 예외도 있지만 거의 인공물이 아닌 자연 대상이며, 그의 사진에는 자연에 대한 그의 경외심 그리고 자연과 자아의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자연주의적 심성이 발견된다. 흔히 한국예술의 미를 말할 때 선과 형태의 아름다움이 거론된다. 그러나 선이나 형태의미가 없는 시각예술 작품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미는 다른 시각으로 파악해야한다. 따라서 필자가 보기에 한국적인 미의 본질은 일본의 미술사학자 야나기 소오에쯔(柳宗悅)이 탁월하게 지적했듯이 자연의 미라고 할 수 있다."
한정식의 사진에서 우리는 유달리 강한 선과 형태의 미에 대한 집착을 볼 수 있다. 인공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직선이 아닌 자연만의 우아한 곡선의 아름다움과 나무, 발 등의 부분들이 가진 형태의 미는 그의 사진의 핵심을 이루는 요소이다. 이것이 작가의 말대로 에로티즘에 대한 관심을 표출해 주는 방법일 수 있겠으나,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유기적 생명체 즉 자연에 숨어있는 본질을 에로티시즘으로 보았기 때문에 결국 그의 사진은 자연에 대한 작가의 애정으로 귀결 될 수 있겠다. 다시 말하면 한정식은 철저한 자연주의자인 셈인데, 이는 그가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고 이를 사진으로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사진가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한정식의 사진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전체 화면에서 불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여백을 이용하는 독특한 공간의식에서 비롯된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그의 사진의 여백은 전통적인 이조시대의 문인화 등에서 볼 수 있는 빈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어두움이 강조되어 인화지 위에 검은색으로 나타나면서 주제를 감싸고 있는 무언가 꽉 채워진 공간이다. 따라서 그의 여백은 무의 세계가 아닌 존재가 생략되어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독자들에게 텅빈 공간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주제를 관조할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의 여백은, 전통적인 한국화의 그것과 같은 효과를 갖는다. 사진을 하나의 정보체계로 보았을 때 그의 사진은 주변의 부수적인 정보를 과감하게 생략함으로써 주요 정보를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인화지 표면의 대부분 또는 일부분의 정보 즉 디테일을 생략해서 여백으로 처리하는 방식은 한정식이 가지고 있는 한국적 공간의식의 표현임과 동시에 그의 사진을 서양의 형식주의 사진들과 구별케 해 주는 중요한 기준점이 된다. 전통적인 서양의 회화나 마이너 화이트의 전형적인 형식주의 시진은 화면전체가 다양한 정보들로 채워져 있어 숨쉴 틈 없이 우리를 압박해 온다. 서양인들의 경우 상당히 익숙한 공간이지만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서양에서화면 전체의 디테일을 살리는 사진인화 기법 - 예를 들어 존 시스템과 같은-등이 발전한 것은 바로 전통적인 그들의 공간의식에서 기인한 바로 크다고 볼 수 있다. 한정식의 사진이 우리가 아닌 서양인들에게 더 한국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런 공간의식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한국사진에서 한정식의 사진이 갖는 위치와 표현방식 그리고 사진의 특징 등을 검토해 보았다. 필자가 보기에 그의 사진은 현재 일반적으로 평가되는 수준보다 훨씬 높은 문화적 위치를 갖는다고 본다. 실제 외국의 문화나 예술양식을 채용해서 이를 체화시키고, 더 나아가 그 이상의 독특한 세계를 창출한다는 것은 여기에 쓰여진 말보다 훨씬 어렵다. 자신이 살고 있는 땅의 정서에 깊이 천착하지 않고 있다면 말 그대로 흉내에 그치기 쉬운 일이다.
그렇게 보면 예술작품은 작가의 정서가 극적으로 표현되는 장소이며, 어떤 형식의 문제보다는 분출된 작가의 의식이 그 작품의 국적성과 질을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한정식의 사진이 외국사진의 모방이라는 위험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국적 사진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까닭은 그의 정서가 순수한 토착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수용한 대상에 대한 접근 방법이나 사진의 미적 가치를 창출하는 방법에 그의 따뜻하면서도 온화한 자연주의적 정서 또는 의식세계가 맞물려 또 다른 사진의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예술작품의 내용과 형식은 별개인 것처럼 보이지만, 상호간에 긴밀한 관련성을 통해 영향을 주면서 하나의 작품에서 변증법적으로 용해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내용과 형식은 간단히 분리해서 논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내용은 일정 과정을 거쳐 형식화될 수 있고 형식 자체가 내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각자의 매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의식의 확고함이라는 전제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의 경우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의 불협화음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우리는 내용과형식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내는 불협화음을 과거 한국사진에서 뿐만 아니라 현재도 많이 보고 있다. 막연한 선진 지향적 사진가들이 갖는 서구 사진에 대한 몰이해와 자아정체성의 부족이 가져다준 결과이다.
한정식의 사진은 비록 전위적이고 첨단의 것은 아니지만, 매체와 자아에 대한 충분한 성찰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생명력을 갖고 있다. 허위의식에 물들지 않은 자아의 정서와 매체에 대한 이해를 순진하게 드러내는 솔직함이 그의 사진이다. 근대 사진의 한 성과인 형식주의는 한정식의 사진에 의해 우리의 것으로 소화될 수 있었고, 이런 우직한 사진가의 존재는 한국사진의 다양성 확보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것이라고 믿는다.
박주석 (사진평론가)
고요의 미학
1.
한정식은 1970년대의 <나무> 연작에서부터 2000년대 이후의 <고요> 연작에 이르기까지 형식주의(formalism) 사진의 가능성을 꾸준히 탐색해 왔다. <나무>와 <발>은 작가가 일관되게 추구해 온 이른바 ‘추상사진’을 향한 시도로 그 결과는 <고요> 연작에서 순도 높은 형태로 완성됐다. 사실 그의 전작(全作)을 ‘형식주의’와 ‘추상’이라는 두 단어 속에 가두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나아가 <고요> 연작에는 작가의 내밀한 시적 감수성과 불가에서 물려받은 초월적 사고의 유산이 두루 섞여있어 서양 사진사의 단단한 논리에 포섭되기 어려운 특수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에서 두 용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거기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의 작업은 사진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피력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런 태도는 그의 저술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를테면 스티글리츠(A. Stieglitz)의 ‘스트레이트 사진(Straight photo)’에 대한 강고한 옹호자의 입장이 저술과 작품 모두에 깔려 있다. 따라서 그의 사진철학을 이해하면 작업의 의미도 함께 보인다. 그 생각을 간략히 더듬어 보자.
‘스트레이트 사진’은 그에게 사진의 정수다. 스티글리츠가 개념화한 이 용어는 다른 매체와 나눠 갖지 않는 사진만의 고유한 특질을 추출해 낸 결과다. 즉 셔터를 누르는 순간 사진은 완성되므로 촬영 이후에 개입할 수 있는 모든 다른 프로세스를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메라는 촬영자 앞에서 펼쳐지는 현실을 기계적으로 포착함으로써 인간의 개입을 애초에 차단한다. 스트레이트 사진의 논리는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스티글리츠의 이런 생각은 얼핏 보면 단순해 보이지만 바탕에는 현대미술의 복잡한 문제들이 깔려있다. 모더니즘 예술의 ‘순수성’ 패러다임 속에서 사진은 자신의 ‘본질’을 주장할 수 있어야 했다. 스티글리츠는 그것을 ‘스트레이트 사진’에서 찾았고 그것만이 사진의 예술성을 지켜내는 길이라 여겼다. 나아가 그는 현대미술의 ‘방향’이 추상을 향하고 있다는 확신에 기초하여 사진의 예술성 또한 추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모더니즘 회화는 인위적으로 형태를 단순화시키다가 결국 화폭에서 사물을 몰아냄으로써 추상의 문턱에 진입할 수 있었다. 현실에 없는 기하학적 패턴을 끌어들이거나 캔버스를 단색으로 덮는 모노크롬 등이 그 예다. 그러나 카메라가 필연적으로 ‘구체적인’ 사물과 마주해야 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사진의 추상이 가능할 것인가. 이 난제를 스티글리츠 스스로는 작업에서 풀지 못했으나 화두는 미국의 형식주의자들에 의해 계승돼 폴 스트랜드(P. Strand)나 에드워드 웨스턴(E. Weston)을 비롯하여 아론 시스킨드(A. Siskind), 마이너 화이트(M. White)로 이어지는 추상사진의 계보를 구축한다. 관건은 사물의 구체성을 지워 형태의 추상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한정식의 ‘사진철학’은 이와 맥을 같이 한다. 하지만 사진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사물을 떼어내기란 쉽지 않다. 사진은 ‘기계적으로’ 렌즈 앞의 사물을 실어 나르기 때문이다. 사물을 축출하려면 손이 개입해야 하고 기계장치의 강제를 차단해야 한다. 수많은 시도를 통해 그 어려움을 몸소 겪었던 작가는 “사진으로 추상을 이루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허무한 짓거리일지도 모른다”고 솔직히 토로한다. 작가는 <나무>와 <발> 연작이 그 ‘어리석은 일’, ‘허무한 짓’의 궤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그는 그 ‘허무한 짓’을 초기부터 시도한다.
2.
<나무 II>에서는 ‘사물’로서의 나무를 선과 면으로 환원시키고자 애쓴다. 방법은 다양하다. 배경을 가급적 단순화시키고 복잡한 형태를 피하기 위해 잎이 없는 나무를 선택해 촬영하는 것이 그 예다. 또한 명암대비를 강화함으로써 나무와 숲의 질감을 희생시켜 균질적인 면으로 변환시키기도 한다. 나무의 형태를 선으로 바꾸기 위해 원거리에서 촬영하는 것도 그 방법에 속한다. 그러나 작품이 보여주듯 나무는 결국 자신이 나무라고 완강히 버틴다. <나무 I>에서의 전략은 약간 다르다. 사진이 어차피 사물의 형태를 버릴 수 없다면 다른 사물처럼 보이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나무 II>에서와 달리 ‘적극적으로’ 형태를 취한다. 그러려면 사물에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전체에서 떼어 낸 부분으로서의 형태는 작가의 의도에 어느 정도 화답한다. 나무는 사람의 상반신 형태를 띠기도 하고, 매끄러운 등의 곡선과 유사해 보이기도 한다. 발가락 형태가 있는가 하면 하반신을 살포시 꼰 여인의 누드를 닮은 형태도 있다. 이름 모를 괴물의 프로필처럼 보이는 나무도 있고 남성의 성기 형태를 띤 나무도 있으며, 도무지 정체를 분간할 수 없는 기이한 형상도 있다. 다른 사물을 닮은 나무를 찾아 작가는 얼마나 많은 나무들을 찾아다녔을 것인가. 때로 작가는 이 다양한 형상들을 얻어내기 위해 나무의 표면에 물을 뿌리기도 하고, 조명을 달리 하여 명암에 변화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 또한 나무의 형상이다. 이는 단지 착시에 불과할 뿐이어서 사물로부터 형상을 걷어내고자 했던 작가의 근본적인 의도가 실현된 것은 아니다. 그래도 작가는 여기에서 가능성을 본다. 그래서 한 발짝 더 들어간다.
<발> 연작이 그 시도다. 하나의 사물이 다른 형상으로 보일 수 있다면 굳이 멀리 갈 필요가 없다. 말하자면 다른 형상을 띤 ‘특수한’ 사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은 다른 형상을 띨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만 형상의 변환은 ‘보편성’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작가의 발은 다양한 형상을 취하는 사물의 상징이다. 이런 생각에 따라 발을 보니 놀랍게도 발은 보는 각도나 거리에 따라, 프레임의 형식에 따라, 조명과 명암의 강도에 따라 풍부한 형상으로 다시 태어난다. <나무> 연작이 에로티시즘에 대한 관심과 관계있다는 작가의 고백처럼 <발> 연작에서도 발은 관능적인 형상으로 재탄생한다. 나아가 피부의 끈끈한 질감 덕에 ‘착시’의 리얼리티는 한층 강화된다.
<나무>와 <발> 연작이 추상으로 가는 길목에 있음은 분명하지만 궁극의 도달점이 아니라는 점 또한 명백하다. 작가가 ‘허무한 짓’이라고 표현한 까닭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를 ‘쓸모없는 짓’이라고 할 수는 없다. ‘구체적’ 형상에서 벗어날 때 추상의 길이 열린다는 자명한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사물이 자신의 ‘고유한’ 형상을 탈피하더라도 결국 형상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 즉 추상의 길과 어긋난다는 사실을 인식한 작가는 회한에 빠져든다. 그리고 이제 사물을 ‘그 자체로’ 보고자 한다. 사실 나무와 발에서 에로틱한 형상을 보고자 했던 작가에게 사물의 본래 형상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풍경론>에서 “내 나무는 나무가 아니었고, 발은 발이 아니었고 풍경은 풍경이 아니었다”고 쓸 수 있었다. 대상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주관에 따라 대상을 달리 인식하는 태도를 유지했던 셈이다. 그러나 <풍경론>에 오면 이런 생각에 변화가 생긴다. 주관적 인식을 가급적 줄이고 대상의 편에 서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물을 보는 태도에 작가는 조심스럽게 ‘관조’라는 말을 붙인다. 이런 인식은 전작(前作)에서 취해 왔던 태도와 다소 거리가 있다. “관조라는 말이 애초에 주관성이 배제된 마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내 사진은 관조와 별 관련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풍경론>은 <나무>와 <발> 연작을 떠받치고 있던 대상과의 관계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정립하려는 시도다. 결과는 사실 그가 전작에서 추구해 왔던 추상의 길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뒤이어 오는 <고요>를 준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숨고르기에 가깝다. 그리고 그 준비 작업은 대상을 어떻게 보여줄지에 대한 고민이라기보다 대상을 어떻게 대할지에 대한 고민의 산물이기도 하다. 관조를 통해 고요에 다가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3.
2002년에 처음 발표한 <고요> 연작은 두 가지 측면에서 작가의 사색이 집약된 결과물이다. 첫째는 70년대부터 줄곧 실험해 온 추상사진의 완성단계라는 점, 둘째는 사물과 형상에 관한 불가의 사상을 사진으로 실천해 옮기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사진의 추상성. <고요> 연작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나무>나 <발>에서처럼 ‘다른’ 형상과 유사하지 않다. 나무와 잎, 줄기, 돌 등 <고요>의 사물들은 단지 환경(배경)과 ‘더불어’ 있을 뿐이다. 사물은 배경 속에 ‘거의’ 묻혀 뚜렷이 구분되지 않거나 흰 배경을 뚫고 우뚝 솟아있더라도 존재의 힘이 미약한 상태다. 검은 사물은 검은 배경에 묻혀 ‘블랙 모노크롬’에 가깝고, 흰 사물은 흰 배경을 동반함으로써 ‘화이트 모노크롬’처럼 보인다. 흑백 대비가 강조된 경우도 있지만 그 경우 흰 바탕 위로 솟아난 여린 나뭇가지나 풀잎은 ‘단지’ 사물의 존재를 넌지시 알려줄 뿐이다. <고요> 연작의 시각적 특징은 그런 점에서 서양 아방가르드 회화의 그것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회화는 사물의 형태를 극도로 단순화시키거나 화폭에서 사물 자체를 추방함으로써 추상의 문을 열 수 있었다. 반면 ‘스트레이트 사진’은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고요>의 작가는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진의 추상화는 사물 벗어나기를 통해 이룰 수 있다. 구체적 사물 없이는 찍히지 않는 사진이 어떻게 사물을 벗어날 수 있을까. 사물을 찍되, 사물이 느껴지지 않고, 작가가 먼저 보이는 사진, 사물의 형태가 아니라 느낌이 먼저 다가오는 사진이 이루어질 때 사진은 사물을 벗어난 것이 된다. 사물이 제1의적 의미에서 벗어나 제2, 제3의 의미를 창출할 때, 의미도 형상도 벗어난 어떤 경지에 이르렀을 때, 그 때 사진적 추상은 이루어진다.” 위의 언급은 작가의 궁극적인 사진철학을 함축하고 있는 것 같다.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이 언명이 무슨 뜻을 담고 있는지 차근차근 풀어 설명해 보자. 우선 사진은 사물(피사체)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사물은 다시 형태와 분리될 수 없으므로 형태를 수반할 수밖에 없는 사진에서 추상을 얻어내기는 어렵다. 따라서 추상사진은 사물을 보여주되 형태로서 지각되지 않아야 한다. 결국 형태로서가 아니라 “느낌이 먼저 다가오는 사진”, “의미도 형상도 벗어난 어떤 경지”가 곧 “사물을 벗어난” 상태다. 추상사진의 딜레마는 두 가지 한계에서 온다. 첫째는 사진 자체의 한계, 말하자면 사물 없이는 사진도 없다는 점, 둘째는 사물의 한계, 요컨대 사물은 형상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형상은 곧 사물 자체다. 작가는 이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두 번째의 한계를 비튼다. 사진에 사물의 형상은 남겨두되(지울 수 없으므로) 그 사진의 지각에서 형상이라는 요소를 배제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형상을 눈앞에 두고 어떻게 형상을 피한 채 지각이 가능할 것인가. 보고도 못 본 체한다는 뜻일까. 작가가 언급하는 제2, 제3의 의미란 형상이 한정시킨 사물의 본래 의미에서 벗어난 상태를 가리키는 것 같다. 예컨대 나무나 발의 의미는 자신의 본래 형상에 귀속된다. 그것이 구체적 형상의 의미다. 작가는 그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형상을 덧씌우고자 했었다. 한편 <고요>의 사물들은 본래 형상을 유지한 채 그 형상이 구속하는 의미에서 달아난다. <고요>의 나무와 돌은 예컨대 숲과 길의 구성요소라는 “제1의적 의미”이기를 그치고 ‘단지’ 관조의 대상으로 남는다. 이런 생각은 작가가 오랫동안 성찰해 온 불가의 가르침으로부터 얻어낸 것이다.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라거나 “그 형상이 허상임을 깨닫는 순간 너는 곧 부처님을 뵌 것”이라는 언급, 나아가 “사물을 벗어남으로써 사진의 추상화를 이루고자 하는 것도 결국은 금강경에서 이미 가르쳐 주신 바를 따르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언급이 이를 반증한다. 그렇다면 <고요> 연작은 불가의 가르침을 ‘시각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사물에서 형상을 효과적으로 걷어내고 있는가. 요컨대 <고요>의 형상들은 진정 ‘허상’인가. <고요>는 오히려 작가가 추구하는 “의미도 형상도 벗어난 어떤 경지”를 향한 지난한 여정의 한 지점에 속한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은 없다. 결국 <고요>는 중단 없는 과정으로만 있다. 현실세계, 즉 감각세계에서 형상의 부재란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고요>가 추구하는 경지는 일종의 메타포라 할 수 있다.
4.
작가는 흥미롭게도 이 메타포를 시각적 요소에서 취하지 않고 청각적 요소에서 따왔다. 고요는 ‘소리 없음’의 다른 이름이나 정작 소리의 완전한 부재 상태에서 청각은 할 일이 없다. 말하자면 고요의 ‘이상’은 청각의 부재를 전제로 삼고 있어 진정한 고요는 청각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세계 어디에도 완전한 고요는 없다. ‘현실의’ 고요는 오히려 작은 소리들로 가득 차 있으며, 소요(騷擾)의 반대급부다. 고요에 소리는 있지만 그 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말하자면 있는 둥 마는 둥하며, 있는 것 같다가도 없으며, 때로는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한다. 반대로 소요에 소리는 항상 있고, 그것도 크고 거칠게 있다. 요컨대 소요는 존재를 떠들썩하게, 현란하게 드러내며 청각을 시각으로 확장시킬 정도다. 이런 대비를 통해 고요의 미학이 드러난다. 고요는 존재를 ‘겨우’ 알려줄 따름이다. 존재를 감추고 드러내기를 은밀히 반복하는 탓에 그것을 지각하려면 모든 감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감각이 무딘 자는 고요를 지각할 수 없다. 나아가 고요의 미덕은 작은 소리, 사소한 존재들을 수용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소요는 늘 더 큰 소리만을 받아들일 수 있다. 작은 소리들은 묻히는 탓이다. 반대로 고요는 아무리 작은 소리도 받아들일 수 있다. 자신보다 더 작은 소리는 없기에, 즉 자신이 가장 작은 소리이기 때문이다. 결국 고요는 모든 존재를 품을 수 있다.
나는 작가가 추구하는 이 고요의 경지가 담(淡)의 미학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고요가 ‘소리-없음’을 상정한다면 담은 ‘맛-없음’을 염두에 둔다. 그러나 고요에 소리가 있듯 담에도 맛이 있다. 다만 담은 묽고 싱거우며 맛을 알아챌 수 없을 만큼 밋밋하여 거의 무미(無味)에 가깝다. 그렇게 담의 미학은 무미의 미학과 통한다. 무미는 맛의 부재를 가리키지 않는다. 무미의 맛은 그 존재를 간신히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미미해서 흔히 아무 맛이 없다고 여길 정도다. 그러나 대관절 맛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항상 어떤 사물의 맛이다. 단 맛, 신 맛과 같은 표현은 개별적인 사물들로부터 추출된 공통의 맛에 대한 추상적 형용어구일 따름이다. 요컨대 맛은 어떤 사물에 귀속됨으로써만 자기 존재를 주장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맛은 우리를 사물에 대한 미각에 붙들어 맨다. 따라서 맛의 진정한 의미는 미각으로부터 사물을 떼어내야만 알 수 있다.
한편 무미는 이 구속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무미를 통해 우리는 맛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나아가 무미는 모든 맛을 수용할 수 있다. 강렬한 다른 맛들은 서로 충돌하거나 섞여 자기 존재를 상실하기 십상이지만 무미는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다른 맛을 돋보이게 한다. 말하자면 무미는 가까스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모든 존재를 포용한다. 모든 강렬함과 현란함을 수용할 수 있기에 무미는 중립적이고 초연함을 유지한다. 소요가 결국 고요에 묻히고야 말듯이 강한 맛도 무미 앞에서는 그 맛을 잃게 마련이다. 소요는 오래가지 못하나 고요는 궁극의 소리이며 무미 또한 같은 의미에서 궁극의 맛이다. 이처럼 고요와 담, 무미는 동일한 경지의 다른 이름들이다. 그리고 그 이름들은 미완의 상태를 가리킨다. 고요가 ‘작은 소리들’로 충만한 상태라면 무미는 ‘싱거운 맛’으로 꽉 찬 상태다. 나아가 고요는 좀 더 작은 소리를, 무미는 더욱 더 싱거운 맛을 지향한다. 비우면서 채워나가는 운동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고요의 미학, 무미의 미학은 유동적이다. 그러나 <고요>의 작품들은 정적이다.
5.
이처럼 근 40년간 작가가 추구해 온 추상사진은 <고요> 연작에 와서 정점에 도달한다. <고요>가 추상사진의 완성형은 아닐지언정 그 지향의 원숙한 단계임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작가의 추상사진이 한국사진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어디일까. 역설적이게도 작가는 <나무>와 <발>, <고요> 등의 추상사진 외에 <흔적>(2006)이나 <북촌>(2010)과 같은 작품집을 통해 ‘기록’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드러내 왔다. 1970년대부터 줄곧 변모하는 서울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왔던 것이다. 그 또한 작업의 일부다. 사실 ‘기록’은 한정식이 작품 활동을 해 온 시기 내내 한국사진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핵심 의제였다. 그의 동료 세대에 해당하는 작가들은 ‘기록’ 패러다임을 비껴갈 수 없었고, 그에 따라 작업의 가치와 의미가 결정되곤 했다. 이는 1950년대 이후 줄곧 한국사진의 흐름을 압도해 왔던 이른바 ‘생활주의 사진’, 말하자면 ‘리얼리즘 사진’의 영향 때문이다. 그리고 그 흐름은 한정식이 사진가로 ‘입문’하는 계기가 된 <동아사진콘테스트>로까지 연결된다. 이 시기에 ‘리얼리즘’과 ‘기록’은 거의 동의어처럼 쓰이고 그것이 사진의 고유한 속성을 규정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는다. 리얼리즘 사진의 옹호자들은 일제 강점기를 풍미했던 이른바 ‘살롱사진’을 회화주의로 규정하고 이를 배척하면서 ‘기록’을 사진의 ‘정도(定道)’로 부각시켰다. 그 과정에서 리얼리즘의 계보에 속하지 않는 작업은 한국사진의 중심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고 다양한 실험들은 설 자리를 찾지 못했다. 말하자면 한국사진의 가능성과 다양성을 위축시켰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양의 형식주의 사진을 수용하여 자신의 작업에 접목시키는 작가들이 등장한다. 한정식은 한편으로는 ‘스트레이트 사진’의 논리에 따라, 다른 한편으로는 추상사진을 지향하면서 ‘리얼리즘 사진’이라는 ‘대세’를 거슬러 그 가능성을 찾아나간다. 이에 대해 박주석은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회화미학의 범주를 따르던 살롱사진과 다른 한편으로 사진의 기록성과 사실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소위 리얼리즘 사진으로 단순하게 양분된 당시의 한국사진에서 이들의 등장은 사진매체의 예술적 가능성을 넓혀주는 사건이었다.”
한정식이 동료 세대의 작가들 중에서 ‘스트레이트 사진’의 논리를 가장 ‘정직하게’ 밀고 나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스티글리츠의 ‘스트레이트 사진’이 궁극적으로는 추상으로 귀결된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결국 모더니즘 미술의 논리와 맥을 같이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따라서 그의 추상사진은 결국 모더니즘의 계보에 속한다. 이런 규정은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지만 1960년대 이후 줄곧 한국사진의 한 복판에서 벌어졌던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보자면 당연한 결론이다. 예컨대 1960년대의 싸롱 아루스나 현대사진연구회 회원들은 명시적으로 모더니즘 사진을 추구했으며, 이런 시도는 즉각 리얼리즘 사진과의 충돌을 야기했다. 그 충돌은 ‘기록’의 패러다임과 ‘표현’의 패러다임이 부딪히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모더니즘을 통해 리얼리즘 사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지만 시대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실험의 차원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후 리얼리즘 사진의 도도한 물결을 거스르는 작업은 거의 나오지 못했다. 그것이 그 시대의 편향성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주명덕, 강운구처럼 ‘기록’의 패러다임을 탄탄히 다지고 그에 의거하여 뛰어난 성과를 거둔 사진가들이 배출됐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표현’의 패러다임은 위축됐다. 한정식은 이런 조건에서 추상이라는 모더니즘의 한축을 꾸준히 탐색해 나간다. 1990년대에는 이른바 ‘메이킹 포토’라는 ‘스트레이트 포토’의 ‘적수’와 맞서면서도 추상의 끈을 놓지 않는다.
한국사진에서 추상이라는 독자적인 영역을 줄기차게 개척해 나간 작가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헐적인 실험이나 단편적인 시도들은 있지만 한정식의 경우처럼 평생을 추상에 매달린 작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아마도 서두에서 언급했듯, 그리고 작가 스스로 고백하고 있듯 사진을 통해 추상을 얻어내기란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결국 <고요> 연작에 이르러 추상의 길을 찾았지만 그 또한 미완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완전한 추상이란 결국 형상의 부재로밖에 도달할 수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마치 완전한 고요는 소리의 부재를 전제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고요가 작은 소리를 허용하듯 <고요> 연작도 사소한 구체들로 구성된 추상이다. 그것이 <고요>의 아름다움이다.
박평종 (미학, 사진비평)
영혼에 닿도록 ‘고요’한
‘고요’한 한낮이었다.
어느 ‘고요’에서는 나뭇잎 하나 물에 떴다. 물 속 그림자 한 점 물고기 되어, 물 바깥 햇살 우러르며 헤엄친다.
또 다른 ‘고요’에서는 물이 가득 찬 하늘로 돌이 떠오른다. 그 돌은 부석사로 날아가려는 걸까?
물보다 공기보다 가벼운 돌을 본다. 물이 돌알을 낳고 있다. 난생설화는 공기 속에도 있다. 물이 사랑으로 돌을 들어 올렸고, 또 돌은 물의 영혼으로 제 마음을 비워 차츰차츰 가벼워진다. 그런 초현실을 현실로 사고 있는 사물들의 세상이 한없이 고요하다. 사물들의 영혼이 그 고요를 징검다리 삼아 이웃으로 나들이 다닌다.
앙리 부르통은 초현실주의를 ‘외과 수술대 위에서의 우산과 재봉틀의 만남’이라 했다.
한정식의 ‘고요’ 작품을 처음 본 날, 부르통은 내 머릿속으로 들어와 초현실주의 정의를 다시 썼다.
많은 ‘고요’들은 순수사진이어서 형태를 알아볼 수 있지만 묘하게도 초현실로 가는 추상이다.
그는 대상의 아름다움에 관심두지 않았다. 특별히 눈길을 끄는 존재들은 그의 사진 눈빛을 받지 않게 된다.
물과 공기처럼, 자연과 일상에서 늘 함께 살아가면서도 의식하지 않았던 온갖 시시콜콜한 것들을 불러내 새롭게 볼 수 있게 한다.
그는 모든 사물에 고정된 이미지를 벗겨 내려했다. 이름을 바꿔 불러주려 했다.
‘고요’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다. 무기물이라 하더라도 그 존재가 품고 있는 어떤 감정 상태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뭣보다 자신이 그것을 느낄 수 있어야 했다. (인간이 아닌) 사물들이 감정을 드러내고 또 작가 자신의 마음밭이 그 감정을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조건 또는 어떤 상태가 ‘고요’였다. 그 고요는 오직 고요만으로 소통되고 교감되었다. 자신의 내면이 대상의 내면만큼 고요해질 때, 그는 대상과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나는 너다,
너는 나다,
라고 속삭이는 그때, 바로 그때, ‘고요’가 태어났다.
박인식 (소설가)
발, 자연으로 드러나는 생명체
한정식은 90년에 나무」 작품집을 내었다. 한정식이 렌즈에 포착한 나무들의 표정을 보고 나는 사진작가의 눈에 대해 내가 배워야 할 것들을 내 눈에 줏어 담는다. 한정식이 대상을 보는 눈은 초월의 세계요, 조형의 무한 넓이이다. 한정식의 나무는 범인들이 만나는 흔한 나무가 아니다. 식물인 나무가 인간의 모습으로 내겐 다가온다.
내가 조지 발란쉰의 안무를 좋아하는 건 발란쉰이 여체 탐미주의자이기도 한 때문인데 한정식의 나무 여체를 나는 수없이 만난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요, 우리 정신을 관통하는 물줄기이다. 나무가 여체로, 토르소로 얼굴로 변하는 시각적 경험은 무지몽매한 내 눈을 개안한다. 여체뿐이랴. 한정식의 나무는 코끼리 등가죽 같은 맨살 위의 나이테가, 원형질 같은 질감이, 또는 질 같기도 하고, 근육 같은, 시멘트가 마르기 전 마치엘과 유사한 힘찬 곡선들이 그의 무궁동 렌즈에서 '숨 쉰다!' 배워야 할 것들을 (세상 살기는 죽을 때까지 배우고, 스스로 익히고, 그리고 그 체험에 만끽한다) 내 눈에 주워 담는 체험은 그래서 남부끄럽지 않다. 나무 연작 이후 한정식은 10여 년 발을 찍었다. 한 대상에 대한 집념은 그가 세상의 안팎을 오로지 렌즈 외에 등한했다는 고독한 걸음이기도 하다. 국민학교 동창생인 그의 썰렁한 키, 검정 뿔테 안경, 동시 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말 속에서도 그의 집념 무장은 내게 완강하고 고집스러워 보인다.
한정식의 「발」 연작에서도 가령 무릎 부위는 그가 빛의 탐험가였듯이 수줍고 신비한 여체 능선과 다시 조우하게 된다. 그가 만나는 피사체는 가령 사금파리나 과일 쇳덩어리라도 인간이나 자연의 흔적들을 걸러내는 묘미에 맞닿는다. 그렇게 생각이 드는 것은 휴먼 드라마가 그의 작품 속의 주제라는 점이다. 무릎과 무릎 사이로 빠져나온 발가락의 에로티시즘 같은 것도 나무 연작의 어떤 경지와의 연속선임이 분명하다. 그의 에로티시즘은 강조하는 대신 숨은 속잎의 찰나적인 영감 같은 것이다. 흔히 강조된, 혹은 노출된 에로티시즘은 때로 천박한 법이다. 그러나 숨어서 그 숨김을 음미할 때 다시 눈이 닿는 성적 도발은 그런 면에서 신선하다.
그의 「발」 연작은 신체의 발이기 전에 육체 체형 그대로 남은 것도 보인다. "몇 가닥 털이 육체의 모선 가파른 끝 부위에 마치 자연의 식물처럼 남아 있다. 사막에 핀 몇 가닥 풀처럼 한정식은 발 속에 그러므로 자연을 끌어들이고 있다. 모래 속에 묻힌 무슨 조갑지 같은 사물도 그러니까 자연의 일부다. 선명하게 드러난 발의 족문은 사선 위로 솟아난 뜻밖의 돌출, 아니, 함성으로 인해 젖은 족문이 흔건한 땀 풍긴다.
나무의 인체, 발의 자연은 한정식의 우주관의 원근법 위에서 자유자재로 숨을 불어 넣는다. 대상을 요리할 때 그의 작업은 이미 남들이 보여준 것을 초월해서 독자적 가치를 부여한다. 그것은 그가 걸어온 운명처럼 미감의 새로운 확대요 또 다른 경이의 눈뜸인데 한 주제 천착의 느린 행보가 작가적 역량의 결실임을 나는 믿는다.
김영태 (시인)
공상(空像, 空相), 한정식 작가의 세계-내-이미지
한정식 작가는 사진 자체가 진리(본질)가 아니라, 사진이 진리를 드러나게 하고, 진리에 이르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진리를 드러내는 방편으로, 사진 교육자이자 작가로서 사진을 대할 때 엄중하고 엄격한 절차를 중시하고 사진이 담아야 할 의미를 충분히 끌어올려 형식과 내용이 다툼이 없는 조화로운 세계를 견지했다. <고요>가 전시되고 사진집으로 묶여 세상에 나올 때마다, 세계-대상-피사체의 동일성을 지향한 작가의 정교하고 빈틈없는, 의미로 꽉 찬 사진 재현은 좀체 변하지 않을 것 같은 형식처럼 생각됐다.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작품들은 감각과 지성이 교차하고 선명하게 흔들린 멈춤, 혹은 구체적인 상 속의 떨림 같은 비의(秘意)적인 자유가 흐른다. 무엇일까. 이 내밀한 이미지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고, 아무것도 볼 수 없는데, 그 무엇도 아닌 ‘어떤 것’이 ‘있는’ 사진. 한정식 작가의 미발표작에는 그러한 것들이 (고요 속에서) 소란스럽게 생성하고 있었다. 필자는 그것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했는데, 바로 공(空)이었다. 한정식 작가의 사진에 들어 있는, 보이지 않는 이것은 공(空)이다! 이 텅 빈 이미지는, 놀랍게도 작가가 그동안 발표했던 ‘고요’ 시리즈를 촬영한 필름 곳곳에, 사이에, 끝에 아무렇지 않게 그냥 있었고, 어떤 연유에선지 세상에 전시될 선택권을 놓친(받지 못한) 사진이다. 이 사진 옆과 위와 아래…에 있던 사진들은 밖으로 나와 자신이 작품임을 입증하고 있었다면 이번에 전시된 사진들은 오랜 시간 빛을 머금고만 있었다. 자신의 몸에 닿은 그때 그곳의 빛을 기억하며, 사진의 시공 속에 고요히 머물렀다. 선택받지 못한 필름들이 선택된 필름 사이에 있었다는 사실은 무척 중요하다. 왜냐면 한정식 작가는 사진의 대상성을 주목해 온전한 형식으로 사진을 촬영하는 도중에 무엇도 아닌, 이름 붙일 수 없는 사진을 찍은 것이다. 이들은 서로 연결 되어 있었고, ‘A’컷을 찍었기에 ‘a’컷이 탄생 될 수 있었다. 상(像)이 선명한 컷과 상(像)이 흐릿하거나 지워진 컷은 공존해야 하는 이미지였던 것이다. 당연히 한정식 작가의 기발표작이 사진의 본질에 닿으려는 욕망에 충실했다면, 선택 받지 못한 이 사진들은 ‘고요’의 의미도 모르고 다만 정적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어떤 것을 찍은 채 숨 쉬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이번 전시는 한정식 작가의 세계-내-이미지, 공상(空像, 空相)이 드러나는 전시라고 생각한다. 한정식 작가의 세계를 이루는 모든 이미지들은 텅 빔 속에서 탄생하거나 텅 빔의 작용을 통해 이뤄진 사진이다.
필자가 명명한 ‘세계-내-이미지’와 ‘공상(空像, 空相)’은 한정식 작가의 작업 세계의 근간을 이룬 불교의 연기설에서 영향을 받은 말이다. 세계 내 모든 존재는 상호 관계에 의해 의미 지어지거나 의미가 지워지고, 존재는 세계 속의 인연(因緣)에 따라 계속 변화한다는 것이 연기설의 요지이다. 다양한 존재가 다기하고 다채롭게 움직이다 인연이 되어 만나고 흩어지는 것.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바라보는 일은 중요해진다.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즉, 학습 받은 데로 보는 것이 아닌, 대상이 드러낸 본무자성(本無自性)을 이해하는 것이고, 이것을 부처는 공(空)으로, 노자는 도(道)라고 일컬었다. 텅 비어 있는 것 같은데 무언가 드러나는 상이 ‘공상(空像)’이고, 모든 상(像, image)은 상호 연결 속에서 일어나고 이루어지는 것이 ‘공상(空相, co-existence)이다. 모두 세계 속에서 인연에 따라 현현(顯顯)하는 것이다. 한정식 작가의 강렬한 흐릿함과 소용돌이치며 빠르게 움직이거나 적막을 이루는 이 이미지들은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함에 대한 메타포이다.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 모두 공(空)에서 비롯되고 공(空)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부연하면, 보는 사람의 마음의 작용, 학습된 시각, 경험의 정도…에 따라 사진 속에 찍힌 대상이 모두 다르게 보일 것이고, 사진 작품과 관객이 맺는 관계에 따라 감상의 정도도 제각각이라는 것. 그래서 한정식 작가의 사진 속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있게’ 된 것이다.
유무상생(有無相生)하는 이미지
아무것도 찍혀 있지 않지만, 무엇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이 사진들은 카메라의 광학적 작용과 그곳에 있었던 대상, 공간의 상호침투로 만들어낸 이미지다. 미술사적으로 접근하면 추상(抽象)이라 하겠지만, 단순히 상이 있고 없고(有無)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관계에 의해 새롭게 형성되는, 노자가 이 이미지를 본다면 유무상생(有無相生) 이미지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구상과 추상을, 단어 그대로 풀이하면, 구상(具象)은 상(象)을 갖추는(具) 것이고 추상(抽象)은 여러 부분 중에 하나를 뽑아낸(抽) 낸 상(象)이다. 구상은 추상을 포함하기도 하고 때로 추상이 구상이 될 수도 있는, 둘은 사실 한 몸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대개 구체적인 상이 보이지 않거나, 구상의 반대 항에 추상을 놓지만, 이항 대립적으로 둘을 해석하려고 할 때 언어 프레임에 갇히는 형국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별개일 수 있으나 존재론적으로 둘은 서로 의지, 보충, 보완하며 존재한다.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말과 침묵, 양달과 응달, 빛과 그림자, 흑과 백으로 팽팽한 긴장 관계에 놓여 있는 이미지. 한정식 작가의 텅 빈 이미지는 ‘모든 것의 이미지’로 관객과 함께 공상(空相)하고 공생(共生)하며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는 사진이다.
한정식 작가는 본인의 논문 <추상사진에 관한 연구>(1991)에서 사진의 추상성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사물이 사물로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선이나 면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든지, 사건이 사건으로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성을 떠나 비현실적 상황을 창출하는 경우에 추상 사진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 형태로 재현되어 있다해도, 그것이 구체적 현실의 재현에 목적을 두지 않는 경우, 대상이 그 현실적 의미를 벗어나, 현실도 단순한 형태도 아닌, 제3의 의미로 전이되어 나타나는 경우를 일러 본고에서는 추상 사진이라고 지칭하였다. 즉, 그들 영상이 언어로는 표현 불가능한 어떤 상황, 다시 말해서 ‘언어 밖의 세계’를 시각화해 제시하는 경우 등을 추상 사진의 대표적 경우로 본 것이다.” 여기에서 ‘제3의 의미’, ‘언어 밖의 세계’는 벤야민의 문지방 영역 혹은 제3의 공간, 바르트의 푼크툼 혹은 무딘 의미, 둥근 의미가 연상되는 비유이다. 모두 말 할 수 없는 것과 찍을 수 없는 것, 보이지 않는 것과 볼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은유이고, 그 세계를 사진으로 촬영하면 한정식 작가의 언급처럼 추상 사진이라 할 수 있다. 한정식 작가는 오래전부터 추상 사진을 통해 사진의 한계와 한계 너머의 세계를 동시에 타진했다. 아마도 이번 전시는 작가의 사진 실험과 사진 수행을 새롭게 조명하는 특별한 시간이 될 것이다.
최연하(독립큐레이터, 사진평론가)
자술서
1.
내가 스물 한 살이 되던 새 해 첫날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내 시 ‘포플러’가 가작으로 입선하여 발표가 되었다. 그 시 자체는 지금 보아 별 것 아니지만, 그리하여 당선이 아닌 입선에 그친 것이지만, 그 일이 내게 미친 영향은 컸다. 무엇보다도 내가 인간적으로 조금 더 자랄 수 있었던 한 계기를 만들어 준 사건이기도 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그 시는 내 정체성의 일면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당시 그 시를 선정해 주신 분이 조 지훈, 노 천명 선생이셨는데 조 선생님의 심사평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 시 한 편을 보시고 내 사람됨을 짚어주신 말씀이었는데, 어떻게 그 짧은 시 한 편으로 나를 그렇게 정확히 보셨는지 어린 나였지만 마음 한 구석이 뜨끔했었다. 요컨대 “이 사람은 인생의 따끔한 맛을 좀 봐야 할 것 같다.”는 뜻으로 기억하고 있다. 때는 1957년, 38선이 휴전선으로 바뀐 지 불과 3,4년밖에 안 되던 시점에서 어찌 이리 한가하고 순진한 시를 쓰고 있을까 하는 한탄이 섞인 말씀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게 바로 나였다. 그리고 ‘나’이다. 나는 퍽 현실적이었지만, 실제로는 현실성이 결여된 사람이었다. 현실적이라는 것은 어렸을 적 집안이(랄 것도 없는 것이, 어머니와 나 단 둘이었으니) 워낙 어려워서 우선은 먹고 살아야 한다는 의식이 철저해 모든 일에 언제나 현실적으로 대처하려 애를 썼다. 그러나 실제로 부딪쳐 보면 나는 늘 현실과 동떨어진 곳에서 어리석은 짓만 골라 하고 있었다.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늘 놓지 못하고 있었음에도 택한 길이 시였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 주는 것이 아닐까. 그게 나였고 아직까지도 바뀌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이다.
한 마디로 실제에 당해서는 늘 현실성이 모자랐는데, 그게 우선 현실과 부딪치는 것을 퍽 부담스러워 해서였다. 남들과 부대끼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것이 늘 싫었다. 그러나 그래서도 오히려 거꾸로 때로는 용감하게 직접적으로 돌파도 해 왔으나 끝내는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것이 내 속마음이었다. 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퍽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사람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나를 조금 더 아는 사람들은 내가 실은 퍽 내성적인 성격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내 사고 방식이 긍정적이고, 비교적 건전하고 밝은 성격이어서 많은 일들을 그렇게 생각하고 응해 왔기 때문에 나를 퍽 활동적이고 진취적인 사람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소위 다큐멘터리 사진을 않는 까닭, 아니 못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현실을 떠난 사진은 자칫 공허해지기 쉽다는 것, 그리하여 사진의 정체성을 기록성에서 찾고 있다는 점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은 하면서도, 현실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쪽으로는 눈이 가지 않았다. 사진에 입문했을 때, 임 응식 선생께서 늘 사진의 기록적 가치를 강조하시던 말씀을 들으며 공부했고 그래서 한때는 그런 사진도 해 보았지만, 결국은 그것은 내가 갈 길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향한 내 눈길은 삶의 깊은 골짜기가 아니라 높이 뜬 흰 구름이었다. 내 ‘나무’가 그래서 나왔고, ‘고요’ 시리즈가 결국은 거기에서 나온 것들이다. 나는 현실에 살면서도, 그리고 비교적 적응을 잘해 잘 살아 왔으면서도, 마음은 늘 현실을 피하고만 싶었던 것이다.
2.
그래서 택한 것이 순수사진(흔히 ‘예술사진’이라 일컫는)이었다. 삶의 현장을 벗어나면 그것은 자연 풍경일 수밖에 없다. 풍경도 현실이요, 따라서 풍경을 찍는 것도 기록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치열한 ‘삶의 현장’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기록만 하는 일상적 풍경사진에 만족할 수는 또 없었다. 그리하여 단순한 외형적 풍경에서 벗어나 내면적 풍경으로 향하다 보니, 쉽게 말해서 ‘사진적 추상’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사진적 추상’이라는 말이 조금 생소할 수도 있으나 ‘추상사진’이라는 말로 바꾸면 조금 이해가 쉬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추상사진’이라면 추상화를 모방한 사진을 연상시키기 쉬워 ‘사진적 추상’이라고 말을 바꾸어 본 것인데, 사진이 아류 회화일 수는 없는 것이고 따라서 추상화를 모방하는 것은 사진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사진만이 할 수 있는 추상의 경지, 다른 매체들과는 확연히 다른 추상을 사진으로 이루고자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진적 추상의 필요성은 무엇일까? 더구나 사진은 구체적 형태를 재현하는 데에서 출발하는 매체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으로 해서 사진의 기록성이 운위된 것이고, 기록성이야말로 사진의 존재이유요, 가치라는 것이 정설이 된 이제 와서 왜 하필 추상일까?
여기에서 ‘사진적 추상’의 필요성이나 당위성을 장황하게 설명할 생각은 없다. 이미 발표한 저술이나 글을 통해 몇 번 설명한 바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사진의 추상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사진의 주제(theme)라는 것이 추상적 개념, 관념이기 때문에 사진 역시 추상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만 밝히고자 한다. 특히 순수사진의 경우 추상성은 거의 필수적 요구라 해서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 더.
현대성과 구분지어지는 근대사진의 시기는 물론 아직까지도 사진의 대부분은 문학성에 기대고 있음이 사실이다. 작가나 관중이나 모두들 사진의 ‘의미’에 매달리는 것이다. 특히 문학적 의미에 매달려 사진이 뜻하는 바 내용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따진다. 그러나 이 ‘의미’라는 것은 문자예술의 영역이지 비문자 예술의 영역은 아닌 것이다.(박 이문의「시와 과학」) 비문자 예술에도 의미라는 것이 있을 수 있고, 있어야 하겠지만, 그럴 때의 의미란 문학적 의미, 곧 언어로 풀이되고 언어로 이해되는 의미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것이 언어로라야 표현, 전달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 전달이 되지 않는 의미가 이 세상에는 더 많이 있음을 흔히들 간과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아름다운 음악, 풍경, 또는 음악도 풍경도 아닌 어떤 감정 같은 것은 언어로는 표현, 전달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설악산 단풍을 보고 와서는 ‘그 황홀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 하는 말들을 무심히 한다. 하지만 이 말의 진의는 내 표현력이 모자람을 한탄하는 말이 아니라 어떤 대단한 시인이 와도 표현해 낼 수 없을 것이라는 데 있다. 그것은 도저히 언어로는 풀어지지 않는 시각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각도 청각도 아닌 내적 경험, 감정은 도저히 말로는 풀어낼 길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매체가 생긴 것이다. 미술이, 음악이, 무용이 그래서 생겼고, 사진이 그래서 발명된 것이다. 이렇게 ‘언어 밖의 세계’는 무한하다. 이 광대무변한 영토에 무관심할 수가 없었고, 그리하여 이 ‘언어 밖의 세계’, 사진으로라야 표현 가능한 광막한 영토 개발에 한 발 내디딘 것이 나의 사진인 것이다.
이를 완성했다고는 감히 생각지 않는다. 내가 시도한 방법론이 유일하다든가 최선이라는 것 역시 아니다. 이를 시각화, 영상화하는 길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작가들의 몫이고 나는 내가 생각하고 추구하는 이 길을 찾아 그저 꾸준히 걸어갈 뿐이다.
3.
신춘문예 입선 통지서를 받고 신문사로 나가 보니 문화부장(한 운사 선생이셨다)이 입선 소감을 써내라고 내게 원고지 서너 장을 건네주었다. 원고지를 받아들고 신문사 옥상으로 올라갔다. 실은 전날 밤에 입선 소감을 뭐라고 써야 할까 생각하노라고 밤을 새우다시피 했지만, 삐걱 삐걱, 옥상으로 향하는 목조 계단을 다 오를 때까지도 한 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다. 원고지를 앞에 둔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부연 하늘뿐이었고 머릿속은 하얗기만 했다. 망연히 서 있을 수만도 없어 초조해 하던 중에 그래도 어쩌다가 한 줄이 떠올랐다. 다음에는 무슨 말을 썼던가 거의 기억에 없지만 맨 첫 구절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외로운 길인 줄은 잘 안다.”
당시만 해도(지금도 별로 변하지는 않았겠지만) 시를 쓴다는 것은 소위 ‘밥 굶는 길’이었다. 시만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것 자체가 그런 것이었다. 물론 각오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특히 사명감 같은 것이 있을 리도 없었다. 그저 까닭도 없이 좋아서 들어선 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게 내 운명이었던 모양이다. 이후 나는 한 번도 큰길로 나서본 기억이 없다. 시를 쓰다가 모자라는 능력을 깨닫고 문학이고 예술이고 다 포기하고는 그 때부터 담배를 배우기 시작했다. 동시에 바둑도 배우고, 장기 두고, 당구 치고, 때로 화투도 쳐 가면서 세월을 보내다가 우연히 들어선 길이 사진이었다. 인생에 우연 아닌 일이 몇이나 될까만, 내 사진과의 만남도 전에는 의식하지도 못했던 우연이었다. 나이 서른쯤 되어서의 일이었다.
그러나 들어서 보니 사진은 시보다 더 외로운 길이었다. 사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때였다. 물론 임 응식, 이 명동 선생을 비롯해 사진계 선배 몇몇 분이 남들의 시선 의식 않고 진지하게 사진을 하고 있었지만 일반적 인식은 물론이요 미술계를 비롯한 문학이나 음악 등 타 분야에서도 사진은 그냥 판박이 기술이지 예술은 아니라는 인식만이 팽배해 있었다. 그리하여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외로운 길’로 나도 모르게 또다시 들어선 것이다. 문학에서 풀지 못한 한을 여기에서 풀어내자고 이를 악문 것도 아니었으니 그저 내 팔자였나 보다 싶을 뿐이다.
그뿐 아니라 내가 택한 소위 ‘순수사진’이라는 것이 사진 중에서도 또 외로운 길이다. 인간의 삶을 추구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이 사진의 중심이라는 인식으로 해서 내가 택한 순수사진은 사진의 변두리로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의 역사에 남은 세계적인 작가들 대부분도 이 다큐멘터리 작가들로, 사진의 순수성(예술성)을 추구한 작가들은 손가락으로 꼽아야 할 정도로 적다. 수의 적고 많음이 무슨 문제일까만 그 까닭이 결국 사진의 정체성, 존재 이유와 이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하여 사진의 또 다른 정체성,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추상성을 추구하는 내 작업은 또다른 외로운 길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줄을 알면서도 이 길을 택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한 마디로, 걷다 보니 저절로 오게 된 길, 내 심성이 찾은 길이다 보니 다 내 팔자일 수밖에. 시에서 풀지 못한 한을 사진에서 풀어보자는 앙심을 품어본 적도 없다. 내 마음 속에서 솟아오른 샘이 내를 만들고 강을 이루어 바다로 향하는 그런 간절한 목마름일 뿐이다. 그러나 이왕 들어선 길, 첫눈 내린 길에 새로운 발자국을 내고 싶은 마음으로 ‘남들이 돌아보지 않는 외로운 길’을 묵묵히 걸을 것이다.
2017년 3월 '밝은 방'에서, 한정식
나의 책과 사진들
사진에 관한 내 생각은 확실하다. 사진은 스트레이트한 사진이라야 한다는 것, 그리고, 사람을 찍은 사진이 사진 중의 사진이라는 것, 이 두 가지를 중심으로 찍고, 쓰고, 가르친다. 스트레이트 사진이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직접적인 사진, 곧은 사진, 다시 말해서 손질을 하지 않은 사진을 가리키는 말로, 원래 사진이란 그런 것이지만, 요 근래에 와서 미술의 영향으로, 소위 ‘만드는 사진’이라고 해서 사진에 손질을 한 사진이 ‘새로운’ 사진으로 횡행하고 있어 이들과 구별해서 쓰는 말이다. 이 말의 근원부터가 20세기 초, 그런 손질을 한 사진의 유행을 경계하면서 진정한 사진의 의미를 부각시키는 말로 미국의 알프렛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s) 등에 의해 씌어진 말인데, 쉽게 말해서 그냥 찍어, 현상․인화한 사진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람을 찍은 사진이란, 사람도 사람이지만, 그들의 생활에 관심을 보이는 사진을 가리킨다. 단순한 풍경 사진보다는 사람의 생활을 다룬 사진이 사진 중의 사진이라는 것이 내 생각인 것이다.
내 책이 이런 방향성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책에서 이런 주장을 직접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 하면, 내가 선생인 탓이다. 내가 단순한 작가였다면 내 책에서 내 주장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선생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나는 사진가이기 이전에 선생이요, 선생이기 이전에 사람이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는 사람으로, 때문에 내 책에서도 그런 입장을 나는 지켰다. 그리하여, 나와 다른 입장에 서는 사진이나 사진가에 대한 이해에도 인색하지 않았고, 학생들에게 그를 이해시키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그 중심에 내 생각을 단단히 뿌리박아 놓기는 했지만.
특히, 「사진예술개론」은 사진 미학의 기초를 나 나름으로 다져 놓은 책이다. 개론서인 만큼 사진의 여러 측면을 골고루 다루되 기술적인 측면은 제외했다. 사진이란 무엇인가, 사진으로의 접근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등, 내가 아마추어 시절,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던 사안들에 대해 나 나름대로 생각하고 깨우친 바를 정리해 놓은 것이다. 사진에 대한 이해만이 아니라, 직접적 촬영에도 활용할 수 있도록 배려를 했는데, 이는 내가 작가이기 때문에 또한 쓸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모르겠다. 작가를 겸한 이론가가 이럴 때에는 효과적일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 그래서 들기도 했다. 요즈음 평론가라는 사람들이 사진에 대한 얘기는 거의 없고, 주제나 소재에 대한 얘기만 주로 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에게 그런 작품 제작의 경험이 없었던 탓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이 책의 바탕에 깔린 내 생각은 역시 스트레이트한 사진, 그리고 사람 사진에 대한 존중이었다. 아마 이 책을 읽은 아마추어 작가들 중에 풍경 사진에 대한 얘기가 별로 없음을 의아하게 생각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풍경 사진만이 아니라, 인물 사진이라고 해서 따로 특히 서술한 것은 없지만, 예를 들거나 서술하거나 간에 사람을 찍은 사진을 중심으로 서술한 것은 내 사진관이 그렇게 정해져 있는 탓일 것이다.
「사진의 변모」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책은 소위 현대 사진의 난해성에 대한 해설을 겸해 쓴 것으로, 때문에 현대 사진에 나타나는 비전통적 사진관 내지는 가치관에 대한 소개를 열심히 하다 보니 내 생각이 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독자도 있는 것 같다. 나와 가까운 사진가 한 사람이 그렇지 않아도 그런 이의를 제기해 오기도 했다.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이 책이 우리말로 쓰여진 책 가운데에서는 제일 잘 쓴 책인데, 다만, 시점이 명확하지 않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이해가 되었다. 현대 사진의 여러 현상에 대해 그 입장에 서서 해설을 했으니까 자칫하면 내 생각이 바뀐 것은 아닐까 하는 오해가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책의 몇 곳에 걸쳐, 특히 뒤의 결론 부분에서 나는 그런 여러 현상은 일시적 유행일 수도 있고 새로운 의식일 수도 있으나, 사진은 그 근본에서 이러저러한 것으로 그 뿌리나 기둥이 바뀌는 법은 없을 것임을 확실하게 밝혀 놓았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시점의 명확성을 흐렸다고 생각하게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즉, 앞에서는 새로운 경향을 그 입장에 서서 설명을 하고 뒤에 가서는 스트레이트한 입장을 옹호하고 있으니 그런 오해가 있을 법도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해인 것은 아마 잘 읽어 보지 않은 탓이 아닌가 싶었는데, 앞에서 이러저러한 현상을 설명을 하고, 그러나, 사진의 진정한 모습은 이러한 것이라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내 생각을 밝힌 것인데 거기까지 읽어 주지를 않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사진-시간의 아름다운 풍경」에서도 그런 내 생각은 확실해서 거기 나온 글이나 사진 중에 순수한 풍경만 가지고 그 풍경의 아름다움을 찬탄한 것은 거의 없다. 이 책은 그야말로 비전문가를 겨냥한 내 사진론이다. 사진이란 이런 것이다 하는 내 생각을 수필 형식으로 풀어 쓴 것으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생각하며 쓴 탓에 용어도 전문적인 용어를 되도록이면 피했고, 문장도 가능한 한 다듬어 읽기 좋게 쓰노라고 애를 쓴 책이기도 하다. 유감스러운 것은 소위 베스트셀러 속에 끼이지 못했다는 것인데, 이 책이 나오자 매스컴이 앞다투어 다루어 주는 바람에 좀 팔리려나 기대가 컸다가, 그것으로 끝이 나고 말아 전문 서적의 한계를 통감했던 것이다. 폭을 넓혀 비전문가를 대상으로 썼지만, 홍보 부족으로 별로 알려지지 않은 탓이 아닌가 싶지만, 지금이라도 알려만 지면 좀 읽힐 것이라는 생각을 나는 아직도 하고 있다.
내년 발간 예정으로 지금 집필 중인 책은 이런 내 생각을 조금 더 전문적으로 좁혀 쓰고 있지만, 한 가지 특징을 미리 든다면, 내 사진에 대한 내 나름의 생각과 주장을 덧붙이고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 썼듯, 나는 언제나 사람 사진이 진짜 사진이라고 주장을 하고 학생들에게 강조를 하면서도 내 작품의 세계는 주로 자연이 그 대상이었다. 사람이나 생활을 찍은 것이 없는 것은 아니면서도 지금까지 간행한 세 권의 사진집(「나무」,「발」,「풍경론」)이 모두 사람 사진이 아니었다. 내 발을 찍은 것이 사람이라면 사람이겠지만, 그 발을 찍은 사진 역시 생활과는 관계없는 내 내적 욕구의 발산일 뿐이었다. 그간 발표한 사진들, 특히, 내 개성이 잘 살아나, 한 아무개다운 사진이라고 평가된 몇몇 사진과 내년에 전시와 작품집 간행을 예정하고 있는 사진이 모두 말하자면 자연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들 사진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사람 사진이 진짜 사진이라고 입으로는 떠들면서 막상 작품으로는 사람을 찍지 않으니 그에 대한 내 입장이 설명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쉽게 말해서, 이 세상에는 사람과 함께 자연이 있고, 따라서 사진이 자연을 다루지 않는다는 것도 말하자면 우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실은 그런 이론을 떠나, 사진가 각자의 개성이랄지 성격과 의논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의 생활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사람 사진으로, 또 자연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자연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내가 이론상으로는 사람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연을 대상으로 한 것도 거기 까닭이 있는 것으로, 내 성격이 현실과의 대결보다는 자연과의 친화 쪽을 택한 때문일 것이다. 남들 역시 나를 그렇게 보아 주고 있는 것 같다. 대상이 무엇이든 그 대상에 친화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 내 사진인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성격이 자연으로 눈을 돌리게 했고, 그것도 주로 부드럽고 온화한, 하여간, 강하지 않은 그런 나무나 물이나 풀이나 하는 것으로 향하게 하였다.
97년에 발간한 사진집 「풍경론」 서문에 나는 다음과 같이 써 넣기도 했다. “나는 사물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쪽보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음미하는 편이다. 있는 그대로의 그들을 사랑하고 받아들인다. -중략- 작품에 관한 한 나는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서구적 체질에서 먼 느낌이다. 나무를 찍든, 발을 찍든, 풍경을 찍든 나는 내 정감으로 그들을 감싼다.” 이런 내 체질이 사람을 찍는다고 달라질 것이 없으니, 사람을 찍어도 그것은 사람이 아닐 것이다. 사람의 모습을 한 나의 풍경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내년에 낼 책에는 내 성격에 관한 얘기나 내 사진에 대한 변명이 아니라 사람 사진이 아닌 사진의 의미나 가치를 나 나름대로 짚어 본 결과를 그 책에 담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속으로는 나도 사람을 찍는 쪽으로 다시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은 해 본다. ‘다시’라고 한 것은 내 사진이 임 응식 선생 밑에서 ‘생활주의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출발했던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사람 사진이 진짜 사진이라고 한 말에 대한 책임도 있으니까.
이제 정년을 앞두고 돌이켜 보면, 난 정말로 ‘선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이란 대체로 모든 좋은 말은 혼자 다 하면서도 스스로는 지키지 않는 사람들인 것이다. 사람 사진이 진짜 사진이라고 학생들 앞에서 늘 떠들면서도 나는 사람을 별로 찍지 않았으니 이거야말로 제 말을 저는 지키지 않는 ‘선생’의 모범이 아닐까 모르겠다.
'밝은 방'에서, 한정식
현실 도피와 작은 깨달음
삶처럼 고달픈 것이 없다. 그리고 예술은 삶에 묶여 헤어나지를 못한다. 예술도 삶인 탓이다.
그렇다면 삶을 벗어나면 안 되는 걸까? 삶을 벗어나면 그게 바로 죽음일까.
죽지 않고 삶에서 벗어나기, 삶을 벗어던지기, 이것이 내 사진이 지향하는 곳이다.
바다에서 느끼는 그리움에 실체가 없듯, 예술에 대한 내 생각 역시 실체가 없는 막연한 그리움 같은 그런 것이다. 예술이, 특히 문학이 인간을 고찰하고, 사회를 고발하고 하는 그런 것에 나는 관심이 없었다. 내 눈에는 그런 것이 띄지 않았다. 현실이 누추하고 비참해도 그것을 부정하고 싸우는 것보다 그 안에서 나를 세우며 살아왔다. 그리고 현실 밖의 어떤 것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까닭을 나는 모른다. 내가 어리석어서, 너무 단순해서 그런 거라고 밖에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다. 겁이 나서 도피하려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려서부터 싸움에는 소질이 없었다. 싸우면 늘 졌다. 그리하여 싸움을 피해 현실 바깥으로 눈을 돌리고는 했다. 현실 바깥쪽에 나를 받아줄 어떤 것이 있다는 확신을 가진 것도 아닌 채 막연히 그저 막연히 그 쪽만 바라보곤 했다. 그러한 막연한 그리움이 내 예술의 실체였다. 구체적 대상이 없다 보니 헛발질, 헛손질이 대부분이었다. 꿈속에서, 날아가는 여인의 치맛자락을 잡으려고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손길처럼 그렇게 허무한 것이 내 예술 세계였다. 내 사진이 생활을 떠나 늘 헛것만 찾아다닌 것이 그래서였다.
내 사진은 결국 작은 깨달음의 고백이다. 아니, 더 큰 깨달음을 향한 발자국이요 중간 보고서이다. 사물에서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에서 아직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 새로운 질서를 찾아냄이요, 그것은 그대로 나의 깨달음이다. 자연 또는 우주 속에 숨은 비밀 캐기요, 그를 통해 얻은 나의 작은 깨달음인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 나의 목표는 더 깊은 깨달음이다. 내가 도달할 수 있을 수 있는 그 끝까지 가 보고자 하는 하나의 실험이요, 땅파기이다.
삶처럼 고달픈 게 없다. 그래서 예술이 삶에 묶여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예술도 삶인 것이다.
하지만 삶을 벗어나면 안 되는 것일까. 삶을 벗어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 죽지 않고 삶을 벗어나는 일, 그것이 내 사진이다.
'밝은 방'에서, 한정식
영상의 자율성. 빛의 자율성
허만하 씨는 언어의 자율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시를, 말을 전달하는 도구로서의 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언어는 소재다’라는 ‘데리다‘의 말을 좋아한다고. 문제는, 사진도 같다는 얘기이다. 영상을, 뜻을 전달하는 도구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영상의 자율성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영상의 영상다움이란 무엇일까. 단순한 형태만은 아닐 것이다. 사진적 특성 위에서의 형태, 회화적 형태와 확연히 다른 형태로서의 영상을 이룰 때 영상의 자율성은 얻어지는 것일 것이다. 사진에서 빛을 생각하는 까닭이 또한 여기에 있다. 사진이 빛의 예술이라는 말은 빛이 사진을 찍는 단순 도구가 아니라, 빛 자체의 자율성, 빛 자체의 독립성을 인식하고 이를 살려야 한다는 뜻인 것이다. 데리다의 말은 여기에서도 같이 쓰일 수 있을 것이다. ‘빛은 소재다’라고.
마이너 화이트의 검정이 그렇지만, 내 첫 나무 사진의 검정이 그렇고, 고요 씨리즈의 검정이 그렇고 하양이 그렇다. 빛을 자연적 형태의 드러냄이 아니라 보다 창조적으로 쓰는 것이다. 물이 검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검은 ‘빛’으로라야 내 사진에서 사물이 제 말을 하니까. 흰 눈은 자연에 가까우려 애를 쓴 것이지만, 이는 자연이 그래서가 아니라, 검정에 상대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그리고 빛의 자율성은 흑백 사진의 경우에 더 필요한 담론으로 작용한다. 컬러 사진은 빛이라기보다 색이라 함일 적절할 것이다. 색도 빛의 한 결과이기는 하지만, 빛이 순수한 빛으로 살아나는 것은 흑백의 경우다. 반대로, 컬러에서 어떻게 빛을 살릴 것인가, 빛의 자율성을 살릴 것인가 하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기도 하다. 물론, 컬러의 경우에는 빛이라기보다 색의 자율성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고, 이는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지만.
내가 이루어야 할 것의 하나를 허 만하 시인은 또 말하고 있었다.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그 대상의 내면세계와 조응하는 순간 비로소 시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억지스럽게 다가간다면 시는 생경해집니다. 풍경의 내면과 나의 내면이 자연스럽게 조응할 때 저는 씁니다. 그럴 때 시에 깊이가 담기게 되지요.” 고요 시리즈가 제대로 되려면 이것을 이루어야 한다. 물, 돌, 풀의 내면과 내가 만나는 것. 나는 그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더 깊어져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 내면적 만남의 문제에 걸린다는 생각인 것이다.
“느낌만의 시작은 이제 버려야 합니다. 서정이 시의 유일신은 아닙니다. 한국 시단은 지금 너무 엷고 센티멘털한 서정의 핵우산 밑에 가려져 있지 않나 우려됩니다. 우산 밖으로 나가서 비를 맞아야 합니다. 우산 밖에 나와 언어를 다지고 또 다지고 그러한 작업으로 시의 지층을 두껍게 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정이 모든 시의 바탕이지만, 문제는 그 서정의 표현입니다. 전통적 서정에서 벗어나야 세계어가 됩니다. 조그만 안정보다 위험한 숲길을 가는 것, 필요하겠지요.” 내 ‘고요 2’가 지향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사진은 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장치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사진의 영역이 아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을 다루는 사진도 있다. 눈빛, 몸짓(포즈)은 분명 시간 현상은 아니다. 시간에 따라 바뀔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간 현상은 아니고 시간과 관계없는 감정적 현상일 뿐이다. 눈빛이나 몸짓은 사진만이 잡아낼 수 있다. 그 역시 순간적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그 자체의 모습을 제 모습 그대로 잡아낼 수 있는 것 역시 사진뿐이다. 눈빛, 몸짓 이전에 존재가 있다. 존재 역시 변하되 변하지 않는 무엇이다. 본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는 변화 이전에 실재하는 어떤 것이다.
고요는 이 존재에 대한 눈길이다.
2012년 9월 '밝은 방'에서, 한정식
사진의 새로운 길
모든 예술은 인간을 떠나서는 의미가 없다. 사진이 더욱 그렇다. 우리의 삶과 밀착되지 않은 사진은 허공에 뜨기 쉽다. 생활을 벗어난 소위 예술사진이 바로 그러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사진이다. 삶과 밀착되어 있지 않을 때 그 아름다움은 신기루처럼 허무하기 쉽다. 풍경을 위주로 하는 예술사진은 그래서 위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로 풍경을 대상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 내 눈에 띄는 것이 우선 자연이기 때문으로, 나는 여러 굴곡진 삶의 절실함보다는 장엄한 자연 앞에서 나도 모르게 무릎이 꺾이며, 아! 하는 탄성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이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왜 나는 자연 앞에서 왜소해지고, 왜 나는 자연에서 감동을 받는 것일까. 내가 안셀 아담스의 사진을 처음 보았던 때의 그 떨림을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장엄한 스케일에 압도당한 면도 있겠지만, 애초 자연이 장엄하지 않았던들 그의 사진의 그 장엄한 스케일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담스의 사진에서는 자연의 장엄한 교향악이 울려오는 듯했다. 사진의 정체성은 기록성에 있고, 기록을 떠나서는 사진의 존재 의미조차 찾기 어려움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러한 기록에서 벗어나 주로 자연을 상대로 작업을 해 왔다. 그것은 물론 내 성격에서 이유가 찾아질 것이다. 그러나 아담스의 사진이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내가 자연에 카메라를 향할 때마다 그는 한 개 벽이 되어 나를 가로 막았다. 그리하여 찾아낸 길이 시야를 좁혀 사물의 존재감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거기에는 또 웨스턴이 버티고 서 있었지만, 나는 그와는 또 다른 내 세계를 찾을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나는 어떤 한 개 사물을 대할 때마다 그 사물의 존재 의미를 깊이 찾아보곤 했는데, 그것은 그 사물의 남다른 존재감을 찾기 위함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연이 처음 태어나던 날에 대한 막연한 외경심 같은 것, 알 수 없는 감동 같은 것을 그 사물에서 찾아보고자 하는 태도이기도 했다. 다만 지금의 자연에서 원시의 그 힘을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자연도 오랜 세월에 걸쳐 인간에 의해 순화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피어 있는 저 작은 꽃 속에는 분명 그 원시적 생명성의 DNA가 숨쉬고 있을 것이다. 저 바위 속에는 땅 속에서 용암으로 솟아오르던 날의 그 시원의 그 원동력이 화석화하여 박혀 있을 것이다. 내 작업은 그 쪽으로도 향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이 내 사진은 추상성을 지향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회화적 추상성을 따를 수는 없었다. 우선 사진과 회화가 전혀 다른 바탕을 가진 예술로, 사진은 일단 재현성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구체적 재현성을 바탕으로 하되 사물을 그 제1의적 의미에서 벗겨냄으로써 사진적 추상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으로 출발했다.
이런 저런 얘기를 썼지만, 말이 무슨 소용이랴. 앞으로도 나는 자연 앞에 무릎 꿇고 그가 하는 말, 그의 몸짓에 온 신경을 기울일 것이라는 것만 밝혀 둔다. 애초에 인간은 인간 혼자의 힘만으로는 살아올 수 없었던 존재였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내가 찍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자연이다. 그 인간의 동반자로서의 자연에 대한 나의 기록이다. 어쩌면 이것은 내 사진에 대한 나의 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찍어놓고 후에 그 이류를 찾다 보니까 이런 말까지 나온 것이지, 애초부터 이런 계획을 세워놓고 사물의 존재로 찾아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단순히 내 발길이 향하는 곳을 따라가다 보니 거기가 바닷가요, 산골이요, 특히 물가였을 뿐이다. 도회지는 나의 현주소임에도 불구하고 내 삶의 공간에서는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태내신앙처럼 나는 순수한 자연 앞에 서야 안도감을 느끼고 숨이 쉬어진다. 그것을 찍은 것이 내 사진이다.
우리는 사진을 ‘찍는다’고 한다. 이 ‘찍는다’는 말 이상으로 사진의 본질적 특성을 잘 드러낸 말도 아마 없지 않을까 싶다. 외국어를 내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영어의 ‘테이크’나 일본어의 ‘토루’는 모두 결과론적 표현이다. 외부의 어떤 사물을 내가 취했다는, 내가 잡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 말 ‘찍는다’는 그 과정에 근거한 말로, 내가 ‘잡는’ 방법을 ‘찍어내는’ 것으로 삼았다는 뜻으로, 사진의 특성이 그 말 속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사진은 사물을 찍어낸다. 밖의 사물을 도장 찍듯 내 카메라로 찍어낸다. 예전에는 사진을 ‘박는다’고도 표현했다. 이 ‘박는다’ 역시 ‘책을 박는다’처럼 그대로 찍어낸다는 뜻이다. 책을 찍어내고, 연지 찍고 곤지 찍듯 사진 역시 밖의 사물을 찍어내는 기술인 것이다. 이 말처럼 사진의 근본 성격(본질)을 잘 드러낸 말도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영어나 일어가 이를 따르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게 소박한 내 생각이다. 그리고 이는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진가들의 이념으로 굳어지면서 사진의 정체성으로 굳어져 왔다.
그러다가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바람이 불면서 이러한 개념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 본질이 무엇이고 근원이 어디에 있든 일단 사진도 이미지의 하나라는 것, 기계로 찍어내었거나 손으로 그렸거나 같은 외형적 이미지라면 굳이 거기 경계선을 그어 그림이네 사진이네 할 필요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인 것이다. 이러한 생각도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면에서 사진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준 획기적 생각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러한 이념만이 그러한 사진만이 소위 현대성을 담보하는 유일한 통로처럼 고착되어 누구나 특히 젊은 층의 대부분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지향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렇지 않은 사진, 사진의 정체성을 지킨 사진은 대체로 기성세대에 의해 지켜짐으로 해서 과거의 사진, 낡은 사진으로 낙인처럼 찍혀 버렸다는 데 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특히 예술에서는 다양성이 그 미덕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여러 형식의 사진, 온갖 이념의 사진이 풍성하게 어울리는 것처럼 바람직한 상황도 없을 것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처럼 불행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풍의 사진만이 현대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것처럼 포장되어 그 좁은 울타리 안에서 벗어날 생각을 못하고 뒤엉켜 있다.
나는 소위 기성세대, 낡은 계층이어서인지는 모르나 사진의 정체성을 지키는 작가들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도 많아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적어도 나만이라도 이 정체성을 바탕으로 작업해야 하겠다는 것, 정체성을 바탕으로 소위 현대성도, 새로운 가능성도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노력하고 있다. 이는 나 혼자만의 생각이요 작업은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찍고 있다. 나는 사진의 정체성 또는 한계성을 지키겠다, 지켜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한계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 있다는 일종의 신념을 가지고 이를 실천해 가고 있는 중이다. 부처님 가르침 중에는 이런 말씀도 있다. 보물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고 있지만, 중생들은 그 그릇 따라 그 보배를 담아갈 뿐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아니 우주는 사실 온갖 보물로 가득 차 있는데 우리 눈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눈이 밝은 사람들은 그 보물을 양껏 받아가지만 눈이 어두운 사람은 바로 눈앞에 보물을 두고도 멀리 헤매며 끝내는 돌멩이를 보물로 알고 돌멩이만 잔뜩 끌어안고 산다.
사진에서도 이 격언은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 눈이 어두워서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이지 길이 없는 것이 아닌 것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 내 능력 여하를 떠나 일단 도전하고 싶은 것이 이것이다. 사진의 한계성, 사진의 정체성을 지켜가면서 거기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기, 새로운 길 찾기인 것이다.
'밝은 방'에서, 한정식
사진이란 무엇인가?
내게 있어서의 사진은 아름다운 어떤 것이다. 아니, 사진만이 아니라 예술이란 것은. 꿈과 같은 것, 그리운 어떤 것, 슬픈 어떤 것, 무언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 세상을 떠난 어떤 것이고,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더 매달리고, 더 해 보고 싶고, 더 찾고 싶은 그런 어떤 것이다.
내게 있어서 사진은 내 한 풀이이다. 무언가 맺힌 마음을 풀어내는 장치. 그런데, 내게는 맺힌 한이 없다. 있다면 태어나기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막연한 그리움, 실체 없는 슬픔, 그런 것들뿐이다. 내가 헤매는 것이 이 때문이다. 나도 내 슬픔의 실체를 모르고 그리움의 까닭을 모르니 사진이 풀릴 리가 없다. 확실한 노여움을 가지고 덤벼드는 사람을 보면 부러울 때가 있다, 그들을 욕하면서도. 확실한 슬픔을 가지고 우는 사람을 보면 부러울 때가 있다. 그것이 ‘하찮은’ 생활고라 해도. 내게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서의 사진은 내 생명의 연소 작업이다. 초가 저를 태우듯 그저 나를 태운다. 불을 밝히겠다는 뜻이 있어서가 아니고, 내가 타야 밝아진다는 거룩한 뜻이 있어서가 아님 역시 물론이다. 그냥 나를 태우는 것. 그냥 타는 것. 결국 나는 유미주의자인가보다. 탐미적이지도 못하면서도 내가 지향하는 것을 보면 이건 숫제 꿈을 꾸자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머리가 나쁜 탓일까. 사실, 현실감각은 내게 부족하다. 우스운 것은 그래도 잘 살았다는 것이다. 현실 감각 하나 없이도 그래도 잘 살아왔다. 내 복이라고 아내는 그랬다.
아내를 만난 것도 그런 것이다. 아내가 살림을 도맡아 했으니까 난 그냥 구름만 쳐다보며 살 수가 있었다. 어려서도 그랬다. 종조부 댁에서 얻어먹으며 자랐다. 종조부 댁을 떠나면 금방이라도 굶어 죽을 것 같아 못 떠났었다. 그래도 마지막 남은 자존심으로 스무 살 되던 해 종조부 댁을 떠났다. 떠나며 남긴 편지에 나도 스물이요 남자입니다, 어쩌고 썼던 기억이 난다. 스무 살에 나라를 평정하고자 한 분이 있었지만, 난 스무 살에 겨우 내 자존심을 찾아 떠났고, 그 후 정말로 내 장담처럼 나는 다시 종조부 댁 신세를 지지 않았다. 물론 심적인 의존은 역시 종조부 댁에 하고 살았지만. 그런 정도로 이후 내 자존심은 또 여러 가지 이유로 접어 두고 살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현실 감각이 없었지만, 현실적으로 잘 살아왔다.
사진계에서 작으나마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도 아마 내 운이고, 복일 것이다. 죽고 나면 곧 지워지겠지만, 어쨌든 내 이완된 신경, 무디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결코 날카롭지는 못한 감각 가지고 이만큼 살아왔다. 모두가 운이 좋았던 탓이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난 나를 기다린다. 내 사진하는 이유가 알려질 때까지, 내게 있어서 사진이 무엇인지, 내가 왜 사진을 하는지 내가 알게 될 때까지 나는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렴풋이 형상화되고 있는 느낌을 요즈음 받는다. 정년 이후의 노력이요, 모색의 결과라 할지...
‘고요’를 시작했을 때 그것이 결국 내가 찾던 길이었음을 느끼기는 했다. 거기에서 부처 찾기라는 것으로 생각을 정리했을 때, 그것이 내 사진이 이르러야 할 지점이라는 것을 느낄 수는 있었지만, 사진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부처님의 얼굴이나 말씀은커녕 그저 분위기를 가지고 그렇게 봐 달라고 조르는 게 아닐까 회의가 들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은 그 쪽으로 내 온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다만, 머리로 밀고 들어가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말로 덤비는 결과를 가져오기 십상이어서이다. 느낌으로 밀고 들어가야 하고, 지적인 사고와 깊이로 이루어야 하리라는 생각이다. 특히 “이와 같이 들었사오니”에서 그런 노력이 결실을 맺기를 기원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그저 ‘선’의 경지를 생각하고 그 쪽으로 밀고 들어가고 있지만, 막연한 선 타령만으로 부처님의 모습은 커녕 희미한 그림자나마 보여질는지 걱정될 뿐이다.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할 뿐.
2010년 '밝은 방'에서, 한정식
적정, 적멸, 또는 공
움직임과 움직임 사이 멈춤의 틈에 시간은 자기 속살을 드러낸다.
고요는 그 시간의 속살이다. 몸이 없는 시간이 몸을 만들어 내는 순간이다.
완성되는 순간 사물은 정지한다. 죽음이 그것이다.
죽음은 고요로의 귀환이다. 근원으로,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는 일이다.
내 사진은 사물의 존재로 향하고 있다. 특히 물, 돌, 풀 등 자연 자체의 존재에 대한 관심이요 애정이라 해도 좋다. 이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내가 왜 자연으로 눈을 돌린 것일까. 사람 사는 얘기, 사람 사는 사회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다 내 눈을 끄는 것은 대개의 경우 인간을 떠난 자연이었다. 현실도피가 아닐까 생각해 본 적도 있다. 그리고 그런 면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내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것은 대자연, 그야말로 ‘대’자가 붙는 자연의 그 장엄함인 것이다. 자연 앞에서 가슴이 먹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게 어떤 구체적 메시지로 다가오는 것은 아닐지언정, 그런 구체적 메시지보다 말로 할 수 없는 무한한 메시지를 그 자연 앞에서 느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안셀 아담스의 ‘윌리엄슨 산’ 사진을 보았을 때의 그 흥분을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거니와, 그러한 자연의 위대함에 난 정신이 없을 정도로 빠진다. 원시 풍경이라 해야 할지, 요컨대,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한 이 육사의 ‘광야’의 풍경을 난 자주 상상해 본다. 내가 지향하는 자연의 사진이란 이런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 풍광의 재현이 아니라, 그 안 깊이 잠겨 있을 시원에 대한 향수, 하늘이 열리던 때의 그 아득함을 생각한다. 그것을 찍고 있다가 아니라, 찍고자 한다, 찍고 싶다.
그러면서도 나는 사물 하나하나를 보고 찍고 있다. 시원의 하늘이, 광야를 나는 아직 열지 못하고 있다. 풍경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꼴이다. 그리로 가고는 싶은데 가는 길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웅장한 풍경 앞에서, 기가 막히고 말길이 닫혀 멍멍히 서 있을 뿐이지만, 그 겉모습을 통해 그 깊은 속으로 들어가 시원의 하늘과 땅을 드러낼 방법을 아직은 모른다. 단순히 재현적 풍경사진을 넘어 자연의 그 장엄함이 원시의 힘찬 숨결이 저절로 느껴지는 그런 풍경을 향해 서 있을 뿐 그리 들어가는 길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결국 한 개 사물을 통해 그 안에 숨어 있는 시원을 찾아 들어가는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으로 자연에 임하고 있다. 원시라 해도 좋고, 개벽의 첫날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놓고 싶은 것이다. 지금 놓여 있는 사물의 DNA 속에는 분명 천지가 개벽하던 날의 기억이 숨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고 싶다. 그것을 펼쳐 놓고 보면 거기 천지 창조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그런 사진을 찍고 싶다. 꽃에서도 나무에서도 바위에서도 또 흐르는 물 속에도 분명 그 날의 생생한 기억은 미미하게라도 남아 있을 것이다. 거기 각인되어 있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그 DNA를 찾아 내가 헤매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진작부터 모색해 오던 사진의 경지, ‘적정, 적멸(寂靜, 寂滅)’ 곧 ‘공(空)’의 경지라는 것도 결국은 사물의 근원적 존재 양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움직임이 사라진 고요, 움직임도 움직임이 아님도 아닌 고요, 다시 말해서 생성 소멸을 벗어나 형태도 사라지고 존재감마저 느껴지지 않는 그런 경지, 모든 존재의 근원이요 동시에 종말인 거기에 ‘공’은 열려 있다. 그 곳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내 <고요>의 또 하나의 시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에서 잠시 썼듯 비언어적 매체로 그러한 관념의 영상화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오히려 내 의도를 벗어나 전혀 다른 의미로 확산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그리하여 그 언저리까지만 가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소설가 김 훈의 글에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자전거 바퀴의 중심에는 움직임이 없다 한다. 중심이 움직이면 바퀴는 구를 수가 없다 한다. 대신 밖의 테두리가 요란하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태풍의 눈이 그러하듯 모든 움직임의 중심은 결국 고요하다는 뜻이다. 그 고요가 곧 ‘공’이다. 존재의 근원이다. 적정, 적멸이 그것이고, 그리고 이 <고요>는 그 ‘공’을 향한 나의 발자국이다.
하늘이 열리던 날의 바람소리가 듣고 싶다. 땅이 처음 솟던 날의 울림을 느끼고 싶다.
그 땅으로 처음 싹을 피워 올린 풀잎의 작은 촉감을 손가락 끝에 누리고 싶다.
2010년 10월 '밝은 방'에서, 한정식
사진의 외형 벗겨내기
사진의 외형은 그것이 그대로 사진의 가능성이자 한계성이다. 사진의 외형은 너무나 단단하다. 그 외형을 존중하여 외형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진이다. 이 기록성은 다른 매체에서 볼 수 없는 사진만의 능력이요 매력이다. 그리고 가능성이다. 그러나 그 단단한 외형으로 해서 관념이나 추상의 세계로 들어가기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외형이 관념이나 추상으로 가는 길목을 막고 나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은 관념이나 추상의 세계를 무시할 수가 없다. 사진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주제라는 것이 대개가 추상적 관념이요 개념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 괴리가 사진의 한계성으로 작용한다. 더구나 언어적 의미 바깥 쪽의 ‘시각적 의미’ 창출을 위해서도 사물의 외형은 타고 넘어야 할 장벽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진의 외형 부수기를 시도해 보았다. 사물의 물질성 자체를 극복할 수는 없고, 해서도 안 되지만, 사물을 그 자체의 일반적 의미로부터 벗겨내기 위해서였다. 사물을 절단해서 전체적 형태로부터 벗겨내고자 하였고, 시간을 이용하여 물의 흐름을 추상화하기도 했다. 외형을 벗어날 수 없는 사진적 한계성을 극복하여 ‘시각적 의미’를 창출하기 위한 모색의 하나였던 것이다. 이들이 외형을 벗어날 때, 다시 말해서 물이나 돌이나 풀이 그들의 실체적 형태를 벗고 나타날 때, 그것은 물, 돌, 풀 따위의 구체적 형태를 벗어난 어떤 모습일 것이다. 이들 사물이 구체적 형태를 벗어나면 그것은 나름대로 추상적 이미지로 공통될 수밖에 없다. 그들 이미지가 한 가지 형태로 단순화하지는 않을지언정, 본래의 각개 사물의 구체성에서 벗어나면 어쩔 수 없이 추상적 형태로 통합되면서 하나의 주제를 형성해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구체적 형태에서 벗어난다 해도 그것이 어떤 ‘형태’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형태를 완전히 벗어나면 그것은 관념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형태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 형태가 사물의 구체성을 띠지도 않는, 곧 관념 직전의, 관념과 형태 사이의 경계에서 멈춰선 형태가 될 것이다. 그것이 소위 사진적 추상의 한 형태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실은 사진이 원래 그러한 것이기도 하다. 사진은 원래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현실도 아니고 현실 아닌 것도 아닌 그런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고 보면 이 사진의 추상화 과정 역시 사진 형성 과정에서 벗어난 독자적 현상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언어의 경우로 잠시 바꿔 생각해 보자. 단어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단어는 의미 전달을 위한 매개 수단일 뿐으로, 그 자체로서 존재해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의미만 그대로 전달된다면, 그 의미가 보다 중요한 것이라면, 거기 사용된 단어는 어떤 단어가 와도 아무 지장이 없다. 요컨대 의미이지 의미 전달의 수단이 아닌 것이다. 사진에 찍힌 사물이 그렇다. 사진으로 찍힌 사물이 물이든 꽃이든 혹은 바위이든 그 자체는 별 의미가 없다. 작가의 의미가 전달되었다면 거기 찍힌 사물이 무엇이든 그 사물 자체의 의미는 사라진다. 사라져야 한다. 사물은 의미 전달을 위한 하나의 소품일 뿐이다. 따라서 꽃을 찍은 사진이 바위를 찍은 사진과 다를 것이 없으며 물 대신 나무를 찍었다고 해서 의미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물을 찍으려다가 바위를 찍은들 그게 무슨 문제일까? 단어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다.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가 의미로 전달될 때에 만들어진다. 상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며,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에 따라 바뀐다. 사진에 찍힌 꽃과 물과 구름은 그래서 동격이다. 물이건 꽃이건 그것이 어떤 의미로 작용하느냐가 문제이지 그것이 물이라거나 꽃이라거나 하는 기존의 의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사진에서 사물이 구체성을 벗는다는 게 이러한 것이다. 이들 이미지가 추상적으로 융합되면서 한 개 주제를 향해 함께 항해한다는 뜻이 이러한 것이다. 대신 구체성이 결여됨으로 해서 어느 한 가지 주제를 지향해도 직접적으로 의미를 적시하기보다는 복합적 이미지를 형성하기 쉽다. 그만큼 다의적 상상력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운 측면이기도 하다.
2012년 9월 '밝은 방'에서, 한정식
사진만의 사진으로 독립하기
사람들은 사진을 찍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사물을 찍고 있다. 사물을 찍으면서 사진을 찍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물’을 찍으면서 어째서 ‘사진’을 찍는다고 할까? 사진은 무엇을 찍을 때 쓰는 도구이다. 그뿐 아니라 사진으로 아무것도 안 찍을 수는 없다. 찍는다, 찍었다고 하면 사물을 찍는 것이고, 사물이 찍혔다는 뜻이다. 결국 사물을 찍는 것이 사진을 찍는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실 ‘사물을 찍는’ 것은 ‘사진을 찍는’ 일과 분명 달라야 한다. 사물을 찍는 일이 곧 사진을 찍는 일이라면 애초부터 두 말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말은 사물이 생긴 다음에 생긴다. 말이 생긴 뒤에 그 말을 따라 사물이 생기는 일은 없다.
시인 중에서는 언어를 그 의미에서 벗겨 언어의 알몸을 찾으려 애를 쓰는 사람도 있다. 의미 전달 도구로서의 언어에서 벗어나 언어 자체의 언어, 의미에 묶이지 않는 언어, 언어의 독자성, 자율성을 찾아 세우고자 한다. 시적 언어로서의 순수성, 김 춘수의 ‘무의미의 의미’가 아마 이런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사진을 사물의 굴레에서 벗겨내어 ‘사진’으로 독립시키는 일, 이것이 ‘사진으로 사진을 찍는 일’이다. 영상 본래의 의미, 영상의 독자성을 찾는 일, 알몸의 영상으로 관객과 만나기. 순수 사진은 이를 지향한다.
사물을 찍지 않고 사진을 찍는 일. 이것이 내 사진의 바탕 생각이지만, 이것은 어쩌면 될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사물을 무시하고서는 할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는 것이 사진이다. 사물이 찍히지 않으면 그것은 사진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사물을 건너, 사진을 찍고자 한다. 이것은 사진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될 수 없는 일이다. 그 될 수 없는 일을 하겠다는 것이 우스운 일일지 몰라도,「고요」작업에 처음 임했을 때 나는 여기에 목표를 두었다. 물론 자신이 있어서도 아니고, 해야 하겠다는 사명감에서도 아니었다. 거기에서 내가 지금껏 추구해 온 내 사진의 참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게라는 생각에서였다. 위대한 선각자들, 사진의 천재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에서 눈치를 채기는 했다. 알프렛 스티글리츠를 비롯해서, 에드워드 웨스턴, 마이너 화이트, 랄프 깁슨 등이 내게 눈짓으로 일러 준 선각자들이었다.
이들의 사진이 전부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 역시 사물에서 벗어나고자 노력을 한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사물을 찍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사물을 찍되 사물이 드러나지 않고 어떤 ‘느낌’ 또는 ‘인상’만으로 남는 것, 이것이었다. 사물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사진 안에 전체적으로 녹아들어 하나의 느낌으로(비언어적 의미, 시각적 의미로) 귀일하는 것. 그리하여 때로는 현실을 넘어서는 것, 벗어나는 것. 이 때 사진은 사물의 재현성을 매미 껍질처럼 벗어 버린다. 그러나 그런 것이라면 이미 스티글리츠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고, 모든 사진이 결국은 그러한 것이 아니더냐 하는 의문이 일 수도 있다. 결국 은유적 사진을 말하는 것밖에 더 되겠는가 하는 의문이다. 사물을 통해 사물이 아닌 작가의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고자 하는 이상 모든 사진은 ‘사진 찍는’ 작업이지 ‘사물 찍는’ 작업이 이미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이제 새삼스럽게 ‘사진 찍기’라니?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모든 사진가들이 이미 해 온 은유가 아니라, 은유도, 직유도 아닌, 사진 자체가 순수한 알몸으로 전하는 메시지를 말하는 것이다. 은유는 언제나 대상을 전제로 한다. A로 B를 말하기 위한 방법론인 것이다. 여인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꽃을 끌어들이고, 사랑의 허무를 ‘무지개’로 연상하게 하듯 애초에 언어 표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개발된 것이 비유법이었다. 내가 지향하는 ‘사진 찍기’란 그런 은유를 떠난 경지이다. 은유 이전, 은유 이후의 경지. 은유의 어떤 구체적 이미지도 거부하고 오직 사물 자체가 사라지고, 느낌이나 관념만이 떠오르는, 아니 관념조차도 사라지고 현실도 벗어난 그러한 궁극의 경지, 사진의 알몸만이 처연하게 드러난 그런 사진을 찾는 작업이다. 사진만의 사진으로 독립하기이다.
2012년 9월 '밝은 방'에서, 한정식
현대사진의 시간성 연구
시간은 사진의 내용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물론 그 시간도 공간적 형태를 통해 나타나기 때문에 공간이 중요한 요소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공간의 형태를 결정지어주는 것이 시간이기 때문에 시간이 공간에 앞서는 것이 사진의 특성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시간성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사진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현대사진의 시기, 즉, 1960 년대부터였다. 그 이전의 사진에는 시간성보다 공간성이 중요시되었는데, 구도를 바탕으로 선명한 초점이라든가 적정노출이 요구되었다는 것 등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우선, 시간을 인식하고 있는 사진이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현대사진에서 볼 수 있는 새로운 현상이었다. 동시에, 개인화된 시간 인식이 영상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시간이 현실로서가 아니라 허구로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시간이 사라지기도 했다. 제작기간으로서의 시간이 필요하게 된 것도 현대사진에 와서 부터였다. 현대사진의 이러한 시간 인식은 사진을 현실에서 분리시켜내는 일에 가일층 박차를 가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사진이 예술을 지향하면서 추상화로 향해 진행 중이었음을 보면, 현대사진의 추상성은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추이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추상이 사진이 도달해야 할 목표라는 것은 아니다. 현재 나타나고 있는 사진의 추상화 경향을 존중하면서도, 사진의 가치, 사진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시간은 사진의 내용이자 형식이다.
사진이 사물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사물을 위장 한 시간의 모습을 대상으로 함을 뜻한다. 우리가 대상으로 하는 사물이란, 특히 사진의 대상으로서의 사물이란 언제나 지금 현재로서의 사물의 형태다. 과거의 사물을 찍을 수 없듯 미래의 사물을 대상으로 할 수가 없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현재 속에서의 사물을 우리는 상대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사진이다. 거시적으로 어제의 사물이 오늘의 사물이요, 내일의 사물일 수 있지만, 미시적으로는 일초의 간격을 두고도 쉬지 않고 변하고 있는 것이 사물인 것이다. 사물에서 사(事)를 빼고 물(物)만 가지고 논할 때도 마찬가지다. 시간을 확대해서 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어제 없었던 사과가 지금 내 앞에 있듯, 내일엔 다시 없어질 수도 있고, 백 년 전의 서울이 오늘의 서울이 아니듯, 백 년 뒤의 서울이 오늘과 같은 모습일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사진의 대상은 변화하는 사물 속에 숨은 시간의 모습이요. 시간의 변화를 관찰, 기록하는 것이 사진의 내용인 것이다.
또한, 시간은 사진의 외형을 결정지어준다. 사진이 우리에게 하나의 메시지로 전달되는 것은 물론 공간적 형태를 통해서이지만, 그 공간을 결정지어주는 것이 시간인 것이다. 셔터가 눌려지기까지 일체의 사물은 현실 속에서 움직임을 계속한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일체의 사물은 움직임과 함께 현실성을 잃고 이미지로 필름에 정착된다. 그것이 사진이요, 시간이 결정지어준 사진의 공간, 사진의 외형인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사진은 시간의 개입 없이 영상을 형성할 수가 없다. 1/2초, 1/125초, 1/1000초 등등, 사진 촬영은 일정한 시간의 경과를 요한다.
빛과 함께 시간은 영상 형상의 기본 요소인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진에 이르기까지 시간성은 별로 주목되지 않았다. 공간성이 강조되었던 것이 근대사진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상의 묘사, 재현에 관심을 두었지. 시간이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가능성에는 무관심했었다. 카메라에는 다양한 셔터속도 선택 기능이 갖추어져 있지만, 근대사진의 대부분은 대상 재현을 위한 기초 수단으로서의 셔터속도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 다양한 셔터속도의 표현 능력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로지 대상의 재현과 그 극명한 묘사만이 사진의 남다른 기능으로 존중된 바, 근대사진에서의 「라이프(LIFE)」 등 그래픽 저널리즘의 융성과 F 64 그룹의 위치나 영향력을 돌이켜만 보아도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근대사진이라고 해서 시간성과 전혀 관계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소위 기록이라고 하는 근대사진 최대의 덕목은 시간성을 바탕으로 하고서 가능했던 기능이다. 전쟁 기록이라든가, 소년, 노동자 실태 조사, 또는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포토 에세이 등등은 얼른 보아 단순히 현실적 사회적 문제를 다룬 것들이긴 하지만, 현실적 문제, 사회적 문제라고 하는 것은 오늘이라는 시점을 두고 내일을 생각할 때 일어나는 문제로 결국은 시간성, 다시 말해서 역사성을 축으로 삼는 사고방식인 것이다. 사진의 기록성이란, 오늘, 또는 지금이 라는 시간을 내일로 넘겨 평가하게 하는 사진의 특수한 기능을 명시한 다른 말일 뿐이다. 그러나 근대사진에 나타난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로서의 시간, 곧, 사진의 대상 자체가 가진 시간의 문제였지 작가의 관찰 방법으로서의 시간은 아니었다. 시간적 관찰이 행해졌다 해도 그것은 현실 재현 과정에서 생긴 부수적 결과였지 시간성을 추구한 끝에 얻어진 성과는 아니었다.
현대는 사진의 시간성을 인식하면서 시작되었다. 시간을 단순히 영상 형성에 개입하는 기본 요소로서 소극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자기표현의 적극적 수단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단순한 현실 기록 수단으로서의 시간이 아니라 자기표현 도구로서의 시간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근대사진과 현대사진을 구분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 시간성을 기준으로 구분할 때, 그 소극적 인식이 근대사진이었다면, 적극적 활용이 현대사진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여기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즉, 현대사진에서의 시간성은 어떻게 근대사진과 차별적으로 인식되었는지, 그로 인한 현대사진의 양상은 어떻게 전개되어 있으며, 그것이 뜻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 글은 밝힐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 시간성을 근거로 해서 고찰할 때도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체로 1960년을 경계로 근대와 현대가 구분된다는 사실이다. 60년대를 현대사진의 출발점으로 보는 근거는 과거에 밝혀놓은 바도 있고, 필자만의 독단적 구분도 아니어서 여기에서는 재론하지 않겠지만, 60년을 경계로 근대와 현대를 나누는 근거가 시간성에 의해 다시 한번 확인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하겠다.
1 시간성의 대두
근대사진이 공간 의식을 바탕으로 성립된 사진이었다고 한다면, 현대사진은 시간성을 축으로 형성된 사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근대사진을 현대사진의 상대 개념으로 파악해서가 아니라, 현대사진과 달리 근대사진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것이 공간성이라고 한다면, 현대사진에서 주로 발견되는 것은 시간성에 의한 영상이기 때문이다. 근대사진 미학은 <결정적 순간>이란 한 마디 용어로 압축된다. 이는 동시에, 근대사진이 소형 카메라에 의한 스냅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음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회화 미학을 바탕으로 한 19세기 사진과 구별되는 근대사진 미학은 스냅 (snap)에 의해서 형성된 것으로, 이 스냅은 소형 카메라를 전제로 한 촬영 방법이다. 그런데, 이 결정적 순간>은 '결정적'이란 관형사가 '순간'이란 명사를 수식하면서 '순간'에 중심이 실림으로써, 마치 시간성에 근대사진이 근거하고 있는 듯 한 인상을 주지만, 이 '순간'은 시간으로서의 순간이라기보다 공간 형성 요소로서의 순간이었다. 물론, 사진의 시간은 공간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필 근대사진만이 아니라 현대사진에서도 '순간'은 공간을 형성 할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그것이 공간 전개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시간 개념의 시각화로서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현대사진은 근대사진과 그 성격을 달리한다.
"그런데, 브레송의 작품은 <결정적 순간>의 현실의 정착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거기에서 시간적인 드라마보다 오히려 보다 공간적인 드라마를 느끼게 된다. 이는 아마 대상과의 거리의 정확한 설정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서 받는 느낌이 아닐까 생각된다. 일본의 평론가 시게모리 코엔이 의견을 같이 하고 있듯, <결정적 순간>의 미학은 시간의 정지, 그를 통한 시간의 관찰을 위한 순간이 아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듯, 극적 화면 구성을 위한 가장 적절한 순간의 선택 문제였다. 다시 말해서, 그 한 장의 사진이 한 개 사건을 전체적으로 암시하고 설명할 수 있을 최선의 한 컷을 위한 '결정적 순간이었다. “특히, 나는 한 장의 제한된 사진 공간 안에, 내 눈 앞에 전개되고 있는 어떤 상황과 그 모두의 에센스를 담는 데 열중해 있었다. 그가 생각한 상황과 에센스, 특히, 상황이라고 할 때 그것은 시간성과 직결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가 노린 것은 시간성으로서의 상황이 아니었다. 특히, 분리된다거나 별도로 감지되는 시간의 문제는 더욱 아니었다. 그의 말에 나타나 있듯, 모든 에센스가 하나로 응축된 종합적 결과로서의 상황이 그가 노린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정신적인 어떤 결정체로서의 결과를 그는 노렸던 것이다. 현실성을 바탕으로 하고 현실에서 한 발자국도 떨어져본 일이 없었던 그의 사진이 현실성보다 추상성을 더 많이 띠고 있는 것도 여기에 그 까닭이 있었다고 하겠다.
이 <결정적 순간>은 그러나 까르띠에 브레송에 의해 최초로 채택된 사진 미학은 아니었다. 그의 영문판 사진집 제목이 이후 그의 사진 미학의 대표적 지칭으로, 그리고 나아가 일반적 사진 용어로 정착되었으나, 실은 근대사진의 출발점에서 스티글리츠에 의해 처음 제기된 바 있었다. "그리하여, 핸드 카메라로 작품을 만드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촬영할 장소를 선택하였으면 인물은 머리에 넣지 말고 먼저 화면을 지배하는 선이나 빛의 관계를 주의 깊게 연구해야 한다. 이것이 결정된 뒤에 지나다니는 인물을 지켜보아야 하는 것이 다. 그리하여, 모든 사물의 움직임에 밸런스가 잡히는 순간을 기다리면 된다. " <결정적 순간>의 출발점이었던 스티글리츠의 스냅 사진 미학 자체가 우선 극적 화면 구성에 있었던 것으로 이는 시대적 상황이 시간이나 공간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을 단계에까지 미처 이르지 못했던 하나의 시대적 한계성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사진은 시간성의 인식에서 출발하였다. "윌리엄 클라인의 뉴욕」은 일찍이 우리들이 체험할 수 없었던 충격적인 영상이었지만, 그의 방법론 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점은 셔터 찬스를 모든 조작 중에서 최우선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클라인의 방법론에 따르면, 그에게 있어서 공 간 형성, 곧, 구도에 대한 의도는 거의 자연적 형성에 맡기는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즉, 그는 미리 구도를 설정하고 난 다음에 셔터 찬스를 기다린다고 하는 방법론이 아니라, 셔터 찬스에 모든 것을 걸고 그 결과로서 필연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구도인 것이다." 까르띠에 브레송의 셔터 찬스(결정적 순간)나 클라인의 셔터 찬스나 용어는 같지만, 그 지향하는바 내용은 완전히 다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까르띠에 브레송이 완벽한 구도(공간 의식 '미리 구도를 설정하고 난 다음에 셔터 찬스를 기다린다고 하는)를 위한 것이었다면 클라인의 것은 구도에 구애받지 않고 셔터(시간의식-셔터찬스에 모든 것을 필연적으로 만들어 지는)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이었다. 이는 사진 매체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온 것이다. 거꾸로, 클라인을 비롯한 현대 사진가들의 그러한 시간 인식이 사진 매체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근대사진은 사진의 현실 유사성을 유일신처럼 믿었으면서도 결과적으로 비현실적 영상만을 생산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이는 한 장의 걸작에 사진의 가치를 거는 걸작의 사진 미학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스냅을 개발하고서도 스냅의 현실감, 시간성보다는 비현실적 심미감과 공간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 근대사진이요, 결정적 순간이었다.
클라인이 구도를 셔터 찬스의 결과에 맡긴다는 것은 결국 공간에서 시간성으로 사진의 중심축을 옮겼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는 공간성이 주는 회화성 내지는 비현실성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론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서, 사진의 사진성은 공간성보다 시간성에서 찾았고, 시간성을 살리기 위해 셔터 찬스에 모든 것을 거는 방법론이었던 것이다.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하여 로버트 프랭크와 함께 현대사진의 선구자로 역사에 남게 된 것은 이 셔터 찬스 우선의 방법론이 사진 인식의 축을 공간성에서 시간성으로 옮기게 하면서 결과적으로 사진에 현실성을 부여하였다는 데서 온다. 현실 유사성에 매달렸으면서도 현실성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근대사진의 벽을 그의 셔터 찬스가 넘어서게 해 주었던 것이다.
클라인이나 프랭크의 영상은 일견 무질서해 보이고 정리되어 있지 않은 인상을 준다. 구도도 완벽하지 않을 뿐 아니라 톤마저도 명쾌하지 않아서 근대사진의 아름다운 화면에 익숙한 눈에는 서툰 사진으로, 때로는 감상자를 무시하는 오만으로까지 오해될 정도로 혼란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현실이란 그렇게 정돈되고 정리되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것이 현실인 것이다. 근대사진의 비현실성은 여기서 온다. 즉, 완벽한 구도, 아름다운 화면은 감상 대상으로 적합하고 예술적일 수는 있어도 바로 그 때문에 현실적이지 못하다. 여기에 비해, 현대사진의 일견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영상은 그 자체로 이미 현실성에 충만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이 회화와 달리 보다 현실적이고 보다 재현적이라 하는 것도 이 현실 유사성에서 오는 것이지만, 현실 유사성은 인위적인 완벽한 구도에서보다는 구도에 구애받지 않고 현실적 질서에 충실한 현대사진의 영상에서 더 느껴진다. 이를 일러 필자는 '이미지의 방목'이라 지적한 바 있지만 현대사진에 이르러 비로소 현실 유사성은 현실성을 부여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현실성을 부여해 준 것이 다름 아닌 사진에서의 시간성 의식이었으며, 셔터 찬스 우선의 방법론이었던 것이다.
2 개별화된 시간
근대사진은 현실 유사성에 집착하여 사진을 현실 복제 수단으로 인식함으로써 사진을 단순히 현실 인식 수단으로 파악하였다. 이는 결과물로서의 사진에만 주된 관심을 기울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대사진은 결과물로서만이 아니라 과정까지도 관심을 기울여, 사진이 공간 재현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님을 간파했다. 공간 재현 중에 일어나는 시간의 의미를 감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대사진에 이르러 사진이 시간예술임을 자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시간에 의지해 사진은 근대사진이 추구했으면서도 이루지 못했던 그 현실성을 실현시켰지만, 그로 인해 발견된 사진의 시간은 거꾸로 사진이 현실 복제 수단으로만 머물 수 없는 것임을 일깨워주었다. 시간이 형성하는 영상에서 사진의 독자성, 사진 영상의 창조적 가능성을 발견해낸 것이다. 이 후의 사진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의 시간성 인식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 첫째로 개별화된 시간성을 들 수 있다. 애초에 시간 자체가 우리들이 팔목에 차고 있는 시계로 잴 수 있는 공유 개념인가 하는 것부터 일단 문제가 될 수 있다. 현대 물리학에서 말하고 있는 것도 시간은 공통하기보다 개별화된 개념임을 말하고 있지만, 현대 사진 영상 형성에 개입하는 시간이야말로 개별적임을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이 현대 물리학적 시간 개념과 연동되어 있다는 증거는 없다. 또한, 이것이 물리학적 검토를 필요로 하는 상황도 아니다. 다만, 현대사진에서 시간이 개별적으로 작용하고 있음과 일치된다는 점에서 흥미로울 뿐이다.
근대사진은 객관성을 바탕으로 한 사진이었다. 소위 말하는 근대사진의 공론성이란 공통된 통념이 작가의 판단 기준임을 뜻한다. 근대사진의 주된 관심사는 인간의 삶의 질에 대한 물음이었다. 그것이 다큐멘터리 사진이라는 것으로 인간이 삶을 영위해감에 있어서의 사회적 당위성과 역사적 방향성이 다큐멘터리 사진의 중심축이었던 만큼 공론성을 위한 객관성은 필수 조건이었다. 까르띠에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은 공간 구성을 위한 순간인 만큼 시간성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기도 했지만, 여기에 필요로 했던 순간이 또한 객관적 시간성, 상식을 근거로 한 일반론적 시간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현대는 영상의 개별화로 막이 올랐다. 클라인의 난폭한 영상도 프랭크의 차가운 이미지도 모두 사진가의 개성이 만들어낸 개인적 영상이었다. 개인 영상에 동원된 시간이 개별화된 인식을 바탕으로 한 시간임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개별화된 시간인식은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셔터 찬스나 타이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근대사진에서의 절정 (climax)은 객관적인 것이었다. 사건의 에센스가 함축되고, 그 한 순간으로 사건의 전모가 파악될 수 있다고 모두가 믿는 그러한 순간을 작가는 기다려 찍는다. 그것이 클라이맥스 셔터 찬스요, 결정적 순간이었다. 그리고 객관적 시간 인식이었다. 그러나 현대사진에서의 클라이맥스는 반드시 사건의 절정이어야 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사진이 사건을 찍는 것에서 벗어난 때문이다. 사건을 찍는다고 해도, 그 시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 투영된 작가의 이미지, 또는 작가의 감성에 반사된 사건의 이미지에 관심을 가진다. 따라서 클라이맥스가 소위 사건의 피크일 필요가 없다. 피크에 대한 인식에 객관성이 사라진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누구나 그 사건의 피크라고 생각할 중성적이고 객관적인 피크를 잡은 것이 근대사진이었다면, 작가가 생각하는 가장 알맞은 순간이 피크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대사진이요, 현대사진에서의 클라이맥스인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클라이맥스의 소멸이라 할 수도 있다. 근대사진에서처럼 누구나 사건의 클라이맥스라 여길 만한 내용이 현대 사진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곧, 셔터 찬스의 자율화를 뜻한다. 작가의 지성이 눈을 뜬 순간, 작가의 감성이 귀를 연 순간이 셔터 찬스이지 사건의 객관적 절정이 셔터 찬스가 아닌 것이다.
"확실히 프랭크의 사진은 새로운 도상학을 수립함에 따라 종래의 사진에서 보여지는 '결정적 순간'이란 주술에서 사진을 해방시켰다. 그 자신도 그 점에 대해서 '나는 그러한 것(결정적 순간)을 사진에서 원하고 있지 않다. 세계는 대단히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세계는 반드시 완벽한 이미지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나는 역사적 사건의 기록에는 흥미가 없다. 내게 있어서의 대사건이란 인식이 명확한 지각으로까지 높아진 순간, 짧기는 해도 강렬한 일순간의 일이다. 그 순간에는 방 안의 한 구석, 의자 등 평상시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물의 미세한 부분, 그들 전부가 피사체가 될 수 있다. 나는 그 확실히 다른 어떤 분명함이 좋아서 이러한 감각을 좋아한다."
현대사진의 시대별 또는 장르별 대표자라 할 로버트 프랭크 마이너 화이트, 그리고 랄프 깁슨 등 어느 사진가든 그들에게 있어서의 시간 인식은 주관적이며 개별적인 것이었음을 각각의 글을 통해 들여다볼 수가 있다. 시간의 개별화는 하필 셔터 찬스에 한한 것은 아니다. 셔터 속도 또한 개별화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근대사진에서의 셔터 속도는 대체로 1/125초를 전후 한 시간대였다. 물론, 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125초를 전후한 셔터 속도가 현실 재현에 가장 알맞은 속도이기 때문인데, 일반 아마추어들이나 초보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셔터 속도가 위의 셔터 속도이며, 보급되고 있는 필름의 감도도 이에 맞추어 중감도 필름이 주종을 차지하고 있음에서도 알 수가 있다. 이보다 빠르거나 느린 속도를 별로 택하지 않은 것은 현실 재현을 기초로 한 세계관 인생관이 근대사진가들의 사진세계였던 때문이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은 정 해진 상황을 존중하여 카메라의 기본적 조건을 거의 바꾸지 않았다고 하는 것에서도 근 대사진가들의 특성은 엿보인다.
현대 사진가들은 이러한 중용적 셔터 속도(1/125초 전후)를 과감하게 벗어났다. 각자의 이미지 형성에 필요한 셔터 속도를 각자가 설정하여 영상의 개인화를 이루었다. 공론적, 객관적 사진에서 개인적 주관적 영상으로의 전이가 이루어진 것이다. 현대사진의 문을 연 윌리엄 클라인의 뉴욕」에서 볼 수 있는 린 영상은 이러한 개인화된 셔터 속도의 첫 보기일 것이다. 근대사진에서라고 떨린 영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로버트 카파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취재한 사진은 물론, 까르띠에 브레송의 사진에서도 간혹 보인다. 그러나 이들 사진은 그 떨림을 의식하고 이를 독자적 영상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시도였다기 보다 전혀 의식하지 못한 우연이었 는가 하면, 계산 안에 들어 있었다 해도 중용적 셔터 속도가 가지고 있는 한계로서, 또는 정지 화면에 움직임을 주기 위한 것이었지, 영상의 독자성을 추구한 결과는 아니었다. 「뉴욕」의 열린 영상을 근대사진의 경우와 구분하여 독자적 영상미 창조로 본 것은 같은 사진집에 사용된 많은 혁명적(radical) 영상이 이 사진의 혁신성을 동시적으로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보다 적극적으로 추구한 것이 슈타이너트(Otto Steinert)의 사진이다. 클라인만 해도 그의 영상은 현실 재현적 성격이 강했다. 그의 떨림은 그 사진의 현실적 성격(음산한 뉴욕의 면모)을 강화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슈타이 너트에 이르면 현실성을 벗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의 현실은 그의 내면적 이미지 창조를 위한 재료일 뿐, 더 이상 복사를 전제로 한 오리지널이 아닌 것이다. 그는 현실을 대상으로 했지 목표로 삼지 않았다. 현실을 뒤져 거꾸로 자기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 그의 사진이다. 사진 메커니즘을 거쳐 비로소 시각화된 사진 독자적 영상미요, 사진메커니즘이 현실을 통해 만들어낸 비현실 이미지인 것이다. 결국, 시간의 개별화가 이루어낸 것은 현실성이기도 했지만, 보다 더 비현실성이었다. 셔터 찬스도 현실 재현을 위한 새로운 방법론이 아니라 개인 이미지 창조의 사진 도구였고, 셔터 속도 또한 대상의 재현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대상에서 사진을 해방시켜 준 열쇠였던 것이다.
3 허구화된 시간
시간은 정지될 수가 없다. 현실은 이 정지되지 않는 시간 위에 존재한다. 따라서, 시간이 정지된 현실이 현실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시간을 정지시킨다. 결국, 시간이 정지된 사진 영상이 현실일 수는 없다. 그뿐 아니라 찍혀진 시간과 보여지는 시간 사이의 심연이 사진과 현실 사이를 가로막는다. 사진이 보여지는 시점에서는 찍혀진 현실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사라져 없어진 현실이 눈 앞에 재현되었을 때 그것이 환영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확실한 사실이다. 이 두 개 시간의 간격의 폭이 넓을수록 사진의 비현실성은 더욱 커진다. 이를 존 버거는 사진의 모호성이란 말로 표현했지만, 이러한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미묘한 간극을 적출해서 감상 대상으로서의 꽃으로 키워낸 것이 현대사진이다.
이는 하필 시간성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현실상과 현실의 차이, 다시 말해서 현실일 수 없는 사진과 현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의 근본적 차이가 사진을 한낱 이미지로, 비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으로, 이를 사진의 한계성으로서가 아니라 가능성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 현대사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진 인식은 시간성 또한 허구화시켜 놓았다. 사진이 애초에 현실에서 시간을 분리시켜 감상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그 시간이 현실에 묶여 있어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시간이 현실을 벗어날 때 그 시간이 창조한 영상이 현실적일 수 또한 없는 법이다. 현실적 시간성을 바탕으로 성립된 기록성을 유일신으로 섬기던 근대사진은 때문에 사실(non-fiction)임을 그 미덕으로 삼았다. 시간의 개별성, 비현실성을 수용한 현대사진은 기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이 기록성을 포기할 때 사진이 사실(non-fiction)일 것을 포기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제 사진도 다른 모든 예술매체들처럼 허구 (fiction)로서의 실체를 솔직히 드러낸 것이다.
허구로서의 사진이란 현실 인식 수단, 또는 현실 기록 수단으로서의 사진의 포기를 뜻한다. 그 기록이 단순 기록, 객관적 기록이 아닌, 자기실현 수단으로서의 기록이라 해도 그 기록을 거부하는 몸짓인 것이다. 의사 현실일 수밖에 없는 사진의 허구성에 대한 적나라한 수용이요, 실천인 것이다. 듀안 마이클즈(Duane Michaels)에게서 우리는 허구화된 영상의 표본을 볼 수 있다. 그의 사진 사상은 사진의 허구성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픽션 그것이었다. 직접적 사진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주제가 그렇기도 하지만, 과거와 미래가 거침없이 등장하고, 상상의 세계가 간단없이 펼쳐진다. 천사가 등장하는가 하면, 죽은 남편이 아내를 찾아오기도 한다. 동화나 우화에서나 나올 이러한 터무니없는 상황이 그의 사진의 대부분의 주제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사진의 한계를 밑바닥에서부터 뒤집는 가히 혁명적 사상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한 세기 전에, 우화를 영상화하고자 했던 노력이 '위대한 졸작'으로 끝난 좋은 예를 우리는 알고 있다. 카메론 여사의 천사(사진)는 평가를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이클즈(Duane Michaels)의 천사(사진)를 시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의 혁명성이 오늘날엔 혁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음을 뜻한다. 여기엔 물론 사진 인식의 명확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카메론 여사에게는 사진 매체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성립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그 너의 천사는 천진난만한 그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동화 속의 천사였음에 비해, 마이클즈의 천사는 사진 매체의 특성을 거스름으로써 오히려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자한 자아 실현 의지로, 그의 천사는 동화로서의 천사가 아니라, 자아에 대한 대자아, 의식에 대한 무의식 등의 상대 개념, 또는 추상적 관념으로 설정된 시각 대상이었다.
이러한 분명한 사진 의식도 현대라고 하는 시대적 배경이 수용을 가능하게 한 것으로, 여기엔 사진의 시간성에 대한 개별적 실험이 이미 여러가지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배경이 한 몫을 하고 있다. 아무리 마이클즈라도 근대사진 초기를 배경으로 했더라면 또 한 번의 '위대한 졸작'을 생산한 결과만을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허구화된 시간의 가장 좋은 표본은 소위 인벤션 포토그래피 (vention photography), 또는 컨스트랙티드 포토그래피 (constructed photography)라고 불리는 일군의 사진에서 볼 수가 있다. 베르나르 포콩(Bermard Faucon), 샌디 스코글런드(Sandy Scoglund)를 비롯해서 신디 셔먼 (Cindy Sherman), 에이린 카윈(Eileen Cowin)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 사진가들은 사진의 대상을 현실에서 구하지 않고, 대상 자체를 작가가 제작해내는, 말하자면 회화나 조각의 수공업적 제작 방식을 차용하고 있다. 이들은 단순히 제작 방식만이 아니라 사상적 근거 또한 소위 애티튜드(attitude)니, 패스티슈(pastiche) 하는 현대미술의 한 사상적 조류에 두고 있다. 이들의 사진은 이 외에도 사진적 특성에 비추어서도 사진으로 보다는 미술의 한 지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지만, 이들 사진에 보이는 허구적인 시간은 이들 사진의 미술적 특성(사진을 미술과 분리해서 생각할 때)에서 오고 있는 것이다.
제리 율즈먼 (J. N. Uelsmann)이나 데이비드 호크니 (D. Hockney)의 멀티 이미지 (multi-image)에서도 허구화된. 시간을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중 삼중으로 겹쳐진 사진이 단일 시간일 수가 없고, 여러 개의 시간이 한 개의 공간에 겹칠 때 그 시간이 현실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각 개의 이미지의 시간은 현실일 수가 있지만, 개체가 모여 이루어진 복합적 시간은 이미 현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작가가 노린 것 또한 복합 영상(멀티 이미지)을 통해 그가 감지한 초현실 세계, 또는 잠재 의식이나 무의식 세계를 시각화시키고자 한 것이기 때문에 시간성을 따로 떼어 논하기도 어렵지만, 잠재의식, 무의식은 물론 초현실이 사진의 내용이라 할 때, 복합영상의 시간성은 따질 것도 없이 허구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시간성이 강조된 복합 영상도 없는 것은 아니다. 입체파 회화의 사진적 실현이라고 할 호크니의 복합 영상은 그야말로 공간의 확장이요, 평면적 시각의 입체화라고 할 공간 의식의 사진들이지만, 후기에 와 움직임을 복수 사진으로 시각화함으로써 시간성을 의식한 다중 인화의 사진도 제작하였다. 이러한 시간성을 염두에 둔 복합 영상은 현실 시간의 공간적 전개라 할 수 있기 때문에 허구화된 시간이랄 수는 없지만, 대개의 복합 영상이 가지고 있는 시간이 허구화된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영상 내용 자체가 비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4 소멸된 시간
사진은 시·공간의 복합체다. 모든 사물이 애초에 시공간의 복합체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이 분리될 수는 없다. 다른 말로 바꾸어서, 사진에서 시간이 소멸될 수는 없는 것이다. 촬영이라는 것이 일단 셔터막이 오르내리는 일정한 시간의 소모를 필요로 하고, 그 속도의 조절이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지게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찍히는 대상 어느 것이건 시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없음으로서이다. 사진에서 시간이 소멸된다면 사진 또한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사진과 시간과의 관계인 것이다. 설사, 그 분리가 가능하다 해도, 사진에서 시간을 빼면 회화가 남고, 사진에서 공간을 빼면 문학이 남을 뿐 사진은 사라지고 만다. 이것이 근대사진까지의 사진이었다. 근대사진까지란 말은 현대사진에 이르러서는 사정이 달라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대사진에서 소멸된 시간을 맞닥뜨리는 일은 드물지가 않다.
시간이란 다시 말해서 현실성이다. 왜냐하면, 현실은 현실적 시간의 흐름 속에서만 존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정지된 현실이 있을 수 없고, 현실과 관계되지 않은 시간이란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시간을 빼어 버리면 비현실이요, 비현실적 상황은 시간을 빼어 버리면 형성된다. 시간을 뺀다는 것은 결국 현실성을 무시한다는 뜻이요. 일어난 결과가 현실과 관련이 없다는 뜻이며 현실적 의미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분명, 현실 속에서 현실적 사건을 찍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 상황의 전달에 목적이 있지 않고, 현실적 상황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현실적 메시지를 지니지 않고 있을 때 그 사진에 나타나는 시간성은, 비록 시간 없이 형성될 수 없는 것이 사진이라 해도, 감지되지가 않는다. 시간성을 찾으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기도 하다. 시간성을 무시하고 만들어진 사진에서 시간성을 찾는다는 것은 소금밭에서 설탕을 찾는 것처럼 어리석거나 아니면 심술궂은 일일 뿐이다.
프리들랜더 (Lee Friedlander)의 대표작, 이 사진은 분명 1972년 어느 날, 뉴멕시코 주의 앨뷰커크 시에 실재했던 한 풍경일 것이다. 그러나 이 사진 어디에서도 엘뷰커크에 관한 메시지나, 또는 1972년의 어느 날이 가지고 있었던 어떤 상황을 읽을 수 없음은 물론, 심지어 실재하는 상황이었을까가 의심 될 정도로 이 사진 아무 데서건 현실성,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인적이 끊긴 마을은 어쩌면 재앙을 받아 인류가 소멸한 어느 도시의 한 모퉁이를 보여주듯 깊은 적막감이 감돈다. 여기 어디에서도 시간성은 감지되지 않는다. 개의 벌린 입이 호흡을 느끼게 해주기는 해도 거기에서 느껴지는 것은 시간성보다 형태상의 변화로서의 공간감만 느껴진다. 역시 프리들랜더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데, 이 사진에서 느껴지는 것 역시 시간성과는 별 관계가 없어 보인다. 인적 없음이 우선 그러한 탈시간의 공간감을 느끼게 해 준다. 전주에 붙어 있는 Lee AV. '란 표지판 이 작가의 이름과 겹쳐 묘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사람은 커녕 움직임의 아무런 낌새도 느껴지지 않는 이 풍경 또한 다른 혹성에서 만난 지구의 풍경처럼 황량한 가운데 낯익은 느낌을 준다. 전혀 현실감을 느낄 수 없는 이 사진에서 시간은 증발을 하고 만 것 같다. 여러 가지 예를 모두 들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다큐멘트가 아닌 개인적 심상 사진에서 시간은 그 현실적 형태를 지니고 나타나기가 어렵다. 개인적 내면 질서가 현실 상황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심상 사진이라고 흔히 불리는 주관적 내면서 사진의 대표적 사진가 마이너 화이트(Minor White)의 사진에서도 시간성은 그 현실적 의미를 잃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마이너 화이트)에게 있어서의 사진 행위란, 스스로의 구조의 심화 속에 시적 현실을 추구하는 것이며, 자기의 현존성 위에서 시적 시간을 재발견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일본의 중견 평론가 이등 준치 '시적 시간'이란 현실성에서 일탈한, 현실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시간을 뜻함은 물론이다. 즉, 현실적 시간의 소멸을 가리키는 다른 표현인 것이다. 여기서 풀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하나 있다. 시간이 소멸된 사진, 탈시간의 사진과 시간이 사상된 회화적 사진과는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문제다. 앞에서 필자는 사진에서 시간이 빠지면 회화가 남는다고 했거니와 그렇다면, 시간이 소멸된 사진은 곧 회화적 사진이라고 오해하기도 쉽다. 그러나 회화적 사진의 경우는 시간성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인식을 분명하게 하고 출발했다는 점에서 일단 차이가 있다. 회화적 사진에 시간 인식이 서 있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사진 매체에 대한 인식이나 사진미학 자체가 확립되기 이전이었던 19세기의 사진이었다는 시대적 한계와, 그 연장선상에서 쳇바퀴 도는 아마추어리즘이 20세기 이후에도 지속된 회화 사진의 중심축이었다는 데 근거를 둔다. 사진 미학상의 온갖 검토가 다 이루어지고 있는 현대사진에서의 탈 시간성이 회화적 사진의 사상된 시간과 같을 리가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이다. 동시에, 회화적 사진이 비록 현실성, 또는 기록성에 무관심했다 해도 그 사진에 찍힌 대상은 어쩔 수 없이 현실이기 때문에 근대사진의 시간성과 함께 이들의 시간성은 현실이다. 다만, 그들이 의식을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시간이 사상된 것으로 본 것이지만, 여기에는 또한 그들 사진이 현실적인 사건을 그 내용으로 하지 않고 있다는 이유가 하나 더 있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시간성을 분리시켜 현실감을 지워버린 현대사진의 소멸된 시간과 근본적으로 다른 까닭인 것이다.
5 작업 과정으로서의 시간
사진에서 시간은 그 작업 과정으로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다시 말해서, 사진 찍는 시간 또는 기간이 사진 영상에 직접적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는 뜻이다. 그림은 그리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문학이나 작곡 등은 약간 경우가 다를 수가 있지만, 거의 모든 예술이 제작 기간으로서의 시간이 아닌, 제작 과정으로서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 연주하는 시간, 움직이는 시간, 이러한 시간이 쌓여 작품을 형성한다. 시간이 쌓이지 않는 한 아무런 형태도 시각화되지 못한다. 오로지 사진만이 이러한 작업 과정으로서의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물론, 1/1000초라도 '시간'은 '시간'이지만, 이러한 시간은 다른 매체의 경우와 견줄 때 작업 과정이랄 수가 없다. 실제로, 이 시간은 '작업' 시간이 아니라 '노출시간인 것이다. 이는 또한 다른 예술이 손으로 제작됨에 비해, 사진이 기계로 제작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른 예술도 기계를 사용할 때가 있지만 그 기계는 인간의 노동력을 대신할 뿐 형태까지 대신 결정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진에서 사진기는 모든 형태를 제가 스스로 형성해 놓는다.
"이 기계 (사진기)는 저 혼자서 그림을 만드는 경향이 너무나 강하다. 화필이나 그림물감이 도저히 해내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 기계는 저 혼자서 그림을 찍는다. 이런 이야기는 그것이 조각되는 기계임을 의미하는 것과는 다르다. (피아노도 바이올린도 카메라가 기계라고 할 때의 의미로서의 기계는 아니다. 이들 악기는 카메라보다도 좀더 붓에 가까운 것으로 취급될 수 있다."
또한, 그림은 대상에 따라 소요로 하는 시간을 달리한다. 그러나 사진에 찍히는 대상은 어느 것이나 같은 시간만이 소용된다. 사진에서의 시간과 회화에서의 시간의 차이, 1/1000초가 어째서 작업 과정이 될 수 없는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진과 그림이 담고 있는 시간에는 또 하나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림 안에 있는 시간은 균일하지가 않다. 화가는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얼굴이 하늘보다 더 많은 시간을 담고 있기 쉽다. 그림의 시간은 인간이 판단하는 가치에 따라 생겨난다. 사진에서는 시간이 균일하다. 어떤 부분이 균일한 시간 동안 균일한 화학 처리를 받는다. 노출되는 시간도 같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영상 형성에 작가가 직접 개입할 수 없다는 점이다. 회화나 음악, 또는 무용은 일정한 시간 동안 작가의 몸짓이나 손짓을 필요로 하고, 몸짓, 손짓이 형상화 작업으로 이어지지만, 사진은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의 움직임 이외의 어떤 몸짓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영상은 물리 화학적 변화를 거쳐 자동적으로 형성될 뿐이다. 장시간 노출의 경우 작가의 개입이 가능하다고는 해도, 간접적 간섭일 뿐 영상 형성 과정에 작가가 개입할 틈은 아무 데도 없다. 이는 영상 형성 과정이 단순한 과학적 프로세스임을 뜻하는 것으로, 많은 사진가들이 현상 인화 작업을 조수나 현상소에 맡기는 까닭이기도 하다. 사진은 그것이 설사 어느 정도의 육체적 노동을 필요로 한다고는 해도, 문학이나 작곡, 또는 설계처럼 그 노동행위 자체가 작품 제작 행위와 직접 연결되지 않는 예술이다. 회화는 손자국으로 개성을 논할 수 있어도 사진에서는 그 개성이 손자국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 따라서, 한두 장 사진의 외형적 특징으로 작가의 개성을 논하기 어려운 까닭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원칙이 무너지고 모든 금기가 해제된 현대사진에서 이러한 논리는 그 자유분방한 표현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방해만 될 뿐이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작가의 표현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온갖 수단을 동원하겠다는 것이 현대사진의 방법론이요, 현대 사진가들의 의식인 것이다. 하기야, 영상 형성에 인간이 개입한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소위 솔라리제이션이 그것으로, 영상 형성 도중에 인위적으로 과다한 노광을 재차 행함으로써 흑화 도중의 영상을 반전시키는 기법이 예술적 목적으로 제작되어 왔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것도 인간의 직접적 개입은 아니었다. 광학적 법칙에 따른 자동적 반전으로, 그 진행을 지켜보다가 적당한 선에서 진행을 멈추게는 할 수 있지만, 그 진행 중의 영상을 작가 임의로 조절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대사진에서는 영상 형성에 직접 개입할 뿐 아니 라. 이미 형성된 영상에 회화적 간섭을 병행하기도 하고 심지어, 영상 자체에 흠집을 내기도 한다. 순수 광학적 영상의 그 차가운 껍질을 벗겨 인간적 메시지를 삽입시키려는 의도이겠지만, 결국은 표현 효과 및 표현 영역의 극대화가 궁극적 목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루카스 사마라스(Lucas Samaras)는 폴라로이드 유제의 다층막 구조를 이용하여, 영상이 형성되는 도중에 물리적인 힘을 가해 영상의 모습을 인위적으로 왜곡시키는 작업으로 폭력적이고 광기어린 셀프 포트레이트를 만들었다. 영상 형성에 인간의 직접적 개입이 이루어진 표본적 사진일 것이다. 사진 위에 덧칠을 한다거나 사진과 회화를 결합해 복합적 이미지를 창출해낸다거나 하는 경우는 요즈음 흔히 만날 수 있다. 소위 '만드는 사진'이 그것으로, 이는 사진에 행해진 회화의 간섭이라기보다 사진과 회화가 만나 이룬 제3의 시각 매체, 소위 믹스트 미디어(mixed media)의 한 형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 소위 '만드는 사진'의 사진 시비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지만, 순수한 사진이든 회화적 사진이든 사진에 인간의 직접적 개입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거리낌 없이 보여 주고 있는 것이 현대사진의 양태인 것이다. “작품 제작의 시간은 일반적으로 사진의 영역에서는 작품 안에 반영되지 않는다. 사진이란 이른바 제로 시간의 표층인 것이다. 그러나 코야마 호타로의 사진-기억의 폐허에서는 작품 제작의 시간이 화면 위에 긁힌 자국이란 물질성에 맡겨져 있다. 그러한 물질로 화한 시간의 맞은 쪽은 작가의 모색의 저편에서 찾아 온 몽환적인, 그러나 나무 껍질의 결마저 또렷하게 떠 올린 또 다른 시간. " 여기에서 말하는 '긁힌 자국'은 톰 바로우(Tom Barrow)의 흠집과는 차이가 있다. 두 사람이 다 완성된 사진 위에 상처를 내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코야마의 경우는 완결된 사진 이미지를 부분 표백 한 위에 얇은 모래종이 따위로 손질을 함으로써, 영상이 입은 상처 자체가 작품의 이미지로 완성됨에 비해, 바로우의 경우는 이미지에 손상을 입힘으로써 영상이 한낱 이미지임을 환기시켜주는, 어떤 점에서는 완성된 이미지에 대한 부정으로서의 흠집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말하자면, 영상 형성 이후에 행한 손질이라는 점에서 영상 형성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코야마의 경우와 다른 것이다. 그러나 X표까지가 작업 과정이고 보면 그 흠집 역시 작업 과정의 하나임에 틀림은 없을 것이다.
근대사진은 사진의 현실 유사성에 지나치게 집착하였다. 현실 복제 수단으로서의 사진의 기록 가치에만 매달려 세상을 내다보는 창으로서, 또는 기억의 창고로서의 기능만을 존중해 왔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서서야 독립된 미학을 정립한 그 일천한 역사를 생각할 때 어쩌면 이야말로 사진의 가장 순수한 진면목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각종 매체를 비롯한 모든 일이 그 초기에 가장 순수한 모습을 보이듯, 그 참된 의미를 찾아 새로이 출발을 한 사진 역시 매체의 건전성이 지켜졌던 것은 초기의 역사에서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강하고 순수했던 근대사진 50년은 사진의 공기능이 활발했던 시기로, 사진은 사회 관찰 수단의 가장 완벽한 도구였다. 이는 결과물로서의 사진에만 주된 관심을 기울였지, 어떻게 찍혔으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수단이 목적에 앞서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이다. 근대사진의 사진사적 의의는 이러한 건전성, 순수성에서 찾아지 않을까 싶다.
현대사진은 결과물만이 아닌 그 과정에까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진의 의미를 공간 재현에서만 찾는 것이 아니라, 공간 재현 중에 일어나는 시간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위에서 살펴본 현대사진에서의 시간성의 여러 양태였던 것이다. 이는 현대에 이르러 매체의 다양한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진이 다양한 가능성에 눈을 떠 다각적 모색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매체의 표현 영역을 넓히게 되었다는 면에서 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동시에 매체의 순수성을 잃기 시작했음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바꾸어 말해서, 목적으로서의 사진보다 수단으로서의 사진에 대한 관심이었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위에서 살펴본 현대사진에서의 시간성의 여러 양태의 또 하나의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것을 부정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사진이 기록적 가치에서 뛰어나다고 해서 여타의 기능을 무시하는 것은 편협하고 폐쇄적인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각종 예술의 시대적 추이가 자유분방한 개성을 존중하여 매체의 독자성만이 아닌 장르간의 벽을 허물어버린 시대에, 사진이라고 해서 순수성을 유지할 수도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사진 역사 이래 지향해 온 자기 표현 매체로서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사진가들이 갈망해 온 목표의 달성이기도 했다. 동시에, 사진이 이렇게 표현 매체로서의 가능성에 보다 깊은 관심을 보인 시기는 기록 매체로서의 가치가 새로운 매체로 해서 평가 절하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시간성에 대한 이상과 같은 인식은 사진을 추상화의 길로 내몰았다. 애초에 분리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분리하여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일단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거기에 시간이 개별화하였다든지, 복합화되고 소멸된 시간이란 것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은 결코 아닌 것이다. 시간이 소멸될 수 없는 것임은 물론, 개별화할 수도 복합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별화되고, 섞이고, 소멸되었다면 그것은 이미 현실적인 시간일 수는 없다. 이는 물론, 필자의 개인적 견해가 찾아낸 용어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현상을 현대사진에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에 사용된 용어이지, 수필이나 시처럼 만들어낸 주관적 형용사가 아님을 필자는 실례로 증거해 보였다.
사진의 추상으로의 길은 필연적이었다. 모든 상황은 반드시 변한다. 현실 유사 성격이 가장 강한 사진이 그 현실성을 포기하고 추상화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어째서 하필 추상으로의 길이었는가는 현실 기록을 포기하고 돌아선 내향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시선이 안으로 향하고, 그것이 더욱이 심층으로 파고 들 때, 현실과 대상은 장애 요인이 될 뿐이다. 현실과 대상을 벗어날 때 내면적 자기 고백은 순수해진다. 그 선례를 우리는 회화에서 찾을 수 있다.
현대사진의 시간 인식은 근대사진의 고전적 인식에서 벗어나면서 사진에서 현실성을 박탈해버리고 말았다. 현실성의 박탈은 그러나, 사진의 능력의 박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새로운 계기가 되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사진의 추상화였다. 회화의 예에서 보듯, 추상화를 위해서는 현실성에서 멀어지고 구체적 형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선행 조건인데, 현대적 시간 인식이 드디어는 사진을 구체성, 현실성에서 벗어나게 해줌으로써 추상으로의 길을 확실하게 열어주었던 것이다. 앞으로 시간 인식과 함께 사진 자체가 어떻게 변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사진이 어떻게 변할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알 수는 없지만, 내일의 책임이 오늘에 있다고 한다면, 오늘의 사진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은 있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진의 존재 이유에 관한 우리들의 관심사이다. 오늘의 사진은 사진의 진정한 모습일까, 또는, 보다 근본적으로 사진이 사진으로 존재해야 할 당위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으며 오늘의 사진은 그 당위성에 얼마만큼이나 근접해 있을까 하는 문제인 것이다. 사진의 추상화가 사진의 표현 매체로서의 입지를 보다 강력하게 보장해 주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과연 사진이 도달해야 할 목표이며 이루어야 할 이상인가 하는 문제는 앞으로 다시 검토되어야 할 과제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된다.
1994년 '밝은 방'에서, 한정식
추상사진에 관한 연구
- 역사적 고찰을 중심으로 -
사진은 그 특성상 추상의 가장 반대편에 서는 매체다. 사진은 구체적인 대상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인화지 위에 그 구체적인 형태를 기록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추상사진"이란 원칙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용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추상을 향해 끈질기게 노력해 온 것이 사진의 역사였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구체적인 대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전과 실험이 사진의 역사로, 아직까지도 내외부에서 계속되고 있는 기록성과 예술성의 시비는 결국 사진의 구체성과 추상성과의 쉬지 않는 싸움 이외에 다름 아닌 것이다. 사진의 예술성은 사진의 기록성에 대한 의문과 부정 내지는 도전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사진의 기록성은 대상의 충실한 복사, 재현을 전제로 한다. 사진의 예술성이 사진의 추상성에 의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근대 사진 이후의 사진 현실이 이를 증거하는 바, 사진 미학이 정립되어 독자적 예술성을 확보하고 있었던 근대 사진은 사진의 재현성을 바탕으로 하고서의 성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이 추구하는 바가 역시 추상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은 사진이 가지고 있는 주제(theme)라는 것 자체가 추상적 관념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결국 추상성에 대한 추구는 사진이 숙명으로 지고 나온 과제였던 것이다. 이 문제는 하필 사진에 한해서의 얘기가 아니다. 예술이라는 것 자체가 감성이나 이성을 바탕으로 한 추상적 작업인 것이다.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는 말은 이를 지적하고 있다. 다만, 다른 예술에 비해 상대적으로 특히 구상적일 수밖에 없는 사진에서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한 고민의 하나였다.
현대에 와서 사진이 회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는데, 이는 이미 회화가 획득한 추상성을 사진에 직접 이식하는 작업이라 하겠다. 장르간 경계의 붕괴라든가 예술의 다 양화로 설명되는 이러한 현상은 회화와 사진의 유착 이외에 다름 아니다. 회화는 사진에서 현대적 복제성을, 사진은 회화에서 추상성을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의 영역을 넓혀 나가려는 의식인 것이다. 사진은 스스로가 이루기 어려웠던 추상을 회화와의 타협에서 쉽게 이룰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진이 그 추상성을 회화와의 결탁에서 추구한 것만은 아니었다. 사진 독자적인 추상적 가능성에 대한 꾸준한 모색이 있어 왔고, 결과 그 완성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이 글은 쓰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추상만이 사진의 예술성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상성은 꾸준히 추구되었는데, 이는 그것이 사진의 한계에 대한 도전이요, 가능성의 개발이라는 데 뜻을 가진다. 회화와의 결합으로 추상화를 이룰 수 있었다고 해서 그 추구가 끝날 수 없는 것 역시 가능성의 개발에 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순수 사진(Straight Photography)의 추상에 대한 열망은 한계성의 극복을 지향하는 의지이다. 사진으로써 사진을 극복하려는 의지이다. 사진가들의 추상을 향한 끈질긴 집념은 그래서 의미를 가진다.
이 글은 사진의 역사 속에서, 사진의 예술성이라고 하는 보다 시급한 목표에 가리워져 미처 눈을 끌지 않았던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에 대한 고찰이다. 비록, 추상성이란 구체적 용어로써 추구되어 오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추구해 오고 이룩해 온 것이, 오늘날의 시 점에서 볼 때, 사진의 추상성에 대한 추구였다는 점에서 이 고찰은 시작되었다. 이 고찰은 역사적 검증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한 하나의 모색을 그 목적으로 삼고 있음을 밝혀 두고자 한다.
추상 사진의 개념
추상 사진의 개념이 미술을 선험자로 하고서의 논의일 때, 미술에서의 추상의 개념이 제일 먼저 검토되어야 할 일일 것이다. 추상 추상성 또는 추상적이란 의미, 구상성 또는 구상적인 반대 개념. 많은 경험에서 특수한 것, 구체적인 것을 버리고, 일반적인 것 또는 개념적인 것에 도달한 과정과 처음부터 현실의 구체적인 시각 체험에 의하지 않고 추상화된 형태(기하학적인 여러 형태)에 의한 방법이 있다.
"추상미술: 비대상 미술, 비구상 미술, 비묘사적 미술이라고도 불리며, 때로는 구체 미술이라고도 불린다. 눈에 보이는 현실의 사물을 묘사의 대상으로 하지 않는 미술을 가리킨다." 이들 미술 용어 사전이 지적하고 있는 바에 의한다면 사진은 본질적인 추상일 수 없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구체적인 것을 버리고"라든지, "눈에 보이는 현실의 사물을 묘사의 대상으로 하지 않는" 것이 '추상'이라면, 구체적인 현실을 대상으로 비로소 성립하는 사 진은 '추상'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매체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에서 추상성을 집요하게 추구한 사진가들은 회화를 모방하여 회화적 추상을 사진으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이를 추상 사진이라 명명한 이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사진을 추상 사진이라 부르는 것은 합당치가 않다는 것이 필자의 생 각이다. 이들은 사진기나 사진적 제작 방법으로 제작한 것이긴 하지만, 그 형태나 추구한 내용이 회화의 모방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사진의 독자성을 결핍한 이들 사진은 사진기로 제작한 추상 회화일 수는 있어도 추상 사진일 수는 없다. 때로, 떨림(blur)이나 초점 흐림(out of focus), 또는 홀림(panning)에 의한 영상을 추 상사진이라 부르는 경우가 있다. 겉으로 보아 형태가 일그러진 소위 데포름(deforme)임 에는 틀림이 없지만, 이는 형태상의 왜곡일 뿐 추상일 수는 없다. 흔들리고 움직여서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지라도 구체적 사물에 묶여 있는 한 추상 '적'이라면 모를까, '추상'일 수는 없다. 근본적으로 사물의 외형을 벗어날 수 없는 사진 매커니즘이 만들어 낸 어떤 형태상의 왜곡도 추상은 아닌 것이다.
결국 사진은 근본적으로 현실적 사물의 외형적 재현에서 출발하는 매체이기 때문에 사진에서의 추상은 그 개념이 회화의 경우와 완전히 달라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다면, 사진의 추상은 어떻게 규정지을 수 있을까? 추상화가 구체적 형태를 넘어선 곳에서 인간의 깊은 의식과 직접 교감하는 그림에 붙이는 이름이라면, 사진에서의 추상 역시 사물의 형태를 넘어선 곳에서 작가의 내면과 직접 만나게 된 사진에 붙는 이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진은 근본적으로 형태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외형으로 추상이냐 구상이냐를 가르는 것은 잘못이다. 사물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도 대상의 객관적 재현성 또는 구체적 지시성에서 얼마나 벗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이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상이 그 자체의 제일의적 의미에서 벗어나 독자적 의미로 재정이 되었을 경우에 추상이란 말을 써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물이 사물로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선이나 면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든지, 사건이 사건으로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성을 떠나 비현실적 상황을 창출하는 경우에 추상 사진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 형태로 재현되어 있다 해도, 그것이 구체적 현실의 재현에 목적을 두지 않는 경우, 대상이 그 현실적 의미를 벗어나, 현실도 단순한 형태도 아닌, 제3의 의미로 전이되어 나타나는 경우를 일러 본고에서는 추상 사진이라 지칭하였다. 즉, 그들 영상이 언어(협의의 언어, 자연언어)로는 표현 불가능한 어떤 상황, 다시 말해서, '언어 밖의 세계'를 시각화해 제시하는 경우" 등을 추상 사진의 대표적 경우로 본 것이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회화와 별개의 예술 양식인 사진에서 굳이 회화에서 가져 온 추상의 개념을 논의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사진에서 추상은 필요한 작업이고, 그러한 논의는 필요한가 하는 문제다. 결론부터 내린다면, 회화와의 관련에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이 추상성이 실험, 모색되어왔고, 현실적으로 추구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고찰은 필요한 것이다. 이를 사진 발명 이후 오늘날까지 줄곧 받고 있는 회화의 영향의 다른 하나로 볼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추상적일 수 없는 사진이 추상을 추구하는 것은 그것이 회화의 영향이라거나 예술을 완성하기 위한 수단이어서가 아니다. 사진의 주제가 추상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 주제를 향수자의 의식 세계로 직접 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추상인 것이다. 향수자의 의식 세계를 직접 지향하지 않고 사물이나 사건의 간섭을 받을 때, 그 사물이나 사건으로 해서 주제가 왜곡되거나 오해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추상 사진이란 명칭으로 불러야 할 절대적인 이유는 없다. 다만, 추상 사진이라고 할 때 그 의미 전달이 용이할 뿐 아니라, 새로운 용어가 줄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추상 사진의 분류
사진에 있어서의 추상은 회화의 경우와 다를 수밖에 없다. 회화와 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도 없지만, 만일 회화의 경우를 그대로 적용한다면 이는 회화적 추상을 사진술을 빌어 이룬다는 뜻이 된다. 사진에서도 회화처럼 선이나 색 또는 면만 가지고 형태를 이룰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회화 양식의 직접적 차용일 뿐 사진이 발견한 사진적 추상일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 오늘날의 사진에서 보이는 추상에는 위와 같은 경우를 포함해서 몇 가지 경우를 추출해 낼 수가 있는데, 이를 편의상 몇 가지 종류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가) 회화적 추상
회화적 방법을 직접적으로 도입한 추상의 경우
나) 복합적 추상
회화를 비롯한 다른 매체와 사진이 복합적으로 융합된 추상의 경우.
다) 사진적 추상
순수한 사진적 방법만으로 이루어 낸 추상의 경우.
가) 회화적 추상이란, 회화의 추상을 사진에 직접 도입한 것을 말한다. 바꾸어 말해서, 사진을 이용하여 회화적 목적을 이룬 경우로, 외형상 사진임에 틀림은 없지만 사진이라고 부르기가 망설여지는 사진이다. 여기에는 다시 두 가지 경우가 있다.
나) 복합적 추상이란, 사진이 다른 매체를 이용하여 그 표현 영역을 넓힌 경우로서, 회화적 추상이 회화에 사진술이 도입된 것임에 비해, 사진에 회화적 접근 방법이 도입된 경우이다. 물에 술을 타나, 술에 물을 타나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발상의 근거가 사진적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주로, 암실 조작이나 사후 처리로 순수한 영상을 변질시킨 경우로, 사진이 그 바탕임이 표면적으로도 드러나고 있어 회화적 추상과 별 혼란 없이 구분된다. 이 또한 다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다) 사진적 추상이란, 순수한 사진적 방법으로 이루어진 추상의 경우로, 동원된 소재들이 소재 본래의 현실적 의미와는 아무런 관련 없이 독자적 의미를 창출하고 있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사후 손질이나 암실 조작 없이, 순수한 기계 이미지에 의하고 있다는 점, 사용된 소재들이 현실성에서 분리되긴 했어도 사진의 고유한 성격인 재현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복합적 추상과 확연히 구분된다. 다시 말해서, 현실 재현의 순수성을 유지하되 전통적 지시성에서 벗어나 작가의 개인적 세계관을 화면 위에 재구성해 놓은 사진을 가리킨다. 이 역시 다음의 두 가지 경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접근 방법에서 인식적인가 창조적인가?, 제작 방식에서 기계적인가?, 인공적인가?, 외형상 재현적인가?, 비재현적인가?, 사진적 특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가, 아닌가?, 등을 기준으로, 순수 사진, 회화적 사진으로 분류하였다. 복합적 추상이란, 사진 위에 회화적 기법이 도포된 것으로, 개발하기에 따라서는 사진과 회화의 융합이 만들어 내는 독특한 장르로 자리를 잡을 수도 있는데, 현재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중이라 보인다. 융합은 두 매체가 혼합되어 분리하기 어렵게 된 경우에, 인용은 도입된 다른 매체의 기법이 확실히 눈에 띄는 경우에 구분하여 사용했다.
한 가지 의문이 있을 수가 있다. 즉, '회화적 추상'으로 분류해 놓은 신디 셔먼이나 베르나르 포콩(Bernard Faucon) 등의 인벤션포토가 '사진적 추상'의 랄프 깁슨 등의 사 진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의문이다. 이들은 표면상 스트레이트한 사진임에 틀림이 없다. 특히 신디 셔먼의 Untitled Film Still 씨리즈나 에이린 카윈 등의 사진은 당연히 '완벽한 사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경우, 프레임이라고 하는 사진 고유 특성에 대한 고려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프레임은 겉으로 볼 때 카메라 파인더의 테두리일 뿐이다. 그러나 프레임은 단순한 물리적 사각형 테두리가 아니다. 사진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일차적 창조 공간이다. 작가 의지의 실현 공간인 것이다." 그런데, 이들 화가들의 프레임은 회화의 캔버스처럼 물리적 테두리, 즉, 그들의 미술 행위를 담기 위한 단순 용기로서의 프레임으로 이해된다. 이들의 사진은 사진으로서의 사진이 아니라 회화 작업의 기록으로서의 사진이라는 점에서 그 사진에 담긴 의식이 다름을 우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들의 사진에서 프레임을 벗겨 내면 그래도 상황은 남지만, '순수 추상 사진'의 경우, 프레임을 벗겨 버리면 사진의 의미 자체가 소멸되고 만다는 점에서 이들을 순수 추상 사진과 구별한 것이다.
이 글은 사진의 추상적 가능성의 고찰을 위해 출발하였다. 따라서 필자가 관심을 가지고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순수 추상 사진'의 경우이다. 이는 소위 사진의 순수성을 지키겠다는 결벽증에서가 아니다. 순수한 사진 자체의 가능성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나름대로 필요하다는 것, 이러한 노력을 통해 사진에 새로운 지평이 열리리라는 것, 그로써, 굳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순수 사진(straight photogra- phy)의 전통 위에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인 것이다. 다)항의 B)에 '순수 추상 사진'이란 이름을 붙은 까닭도 이 때문이다.
추상 사진의 대두
추상 사진을 생각할 때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만 레이(Man Ray)나 모홀리-나기 (L.Mo- holy-Nagy)들이다. 이들은 사진이 독자적 특성을 자각해 가면서 그 예술성을 확립해 가는 시기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사람들로, 만 레이는 다다, 슈르리얼리즘을 통해, 모홀리 나기는 바우하우스의 뉴 비전을 통해, 추상적 사진을 제작한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한 것은 그것이 설사 추상적인 사진에 관계가 있었다 해도 순수한 사진적 가능성으로서의 추상은 아니었다. 만 레이는 초현실 회화를, 모홀리 나기는 새로운 시각을 추구하던 과정에서 얻어진 부수적 성과였을 뿐이다. 만 레이는 사진의 재현성이 그 예술성에 부담이 된다고 생각해 왜곡과 변형을 시도했다." 이러한 그의 사진은 사진이라기보다 초현실주의 회화의 한 양식으로 이해된다. 그는 사진가라기보다 예술가적 입장에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실험했는데, 그 예술적 가능성의 하나로, 당시 과학과의 접맥에서 그 참신성을 보이고 있었던 사진을 이용해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의 작업에 여러 매체가 자유로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결국 사진의 예술적 가능성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 회화의 융통성에 대한 관심, 즉, 회화적 목적에 이용 가능한 수단으로서의 사진이 그의 관심 대상이었다. 캔버스로서의 인화지였고, 블러시나 그림칼로서의 카메라와 렌즈였던 것이다. 이러한 복합적 사고방식은 개방적이고 진보적이며 매체의 발전에 기여하는 폭 넓은 자세이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매체의 순수성이란 측면에서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사진의 발전에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를 떠나, 사진과 회화를 나누어 고찰할 때 특히, 이 글처럼 사진적 입장에서 사진의 가능성을 고찰하고자 할 때 더욱 그러하다. 그는 모홀리 나기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문제로, 그에게 있어서의 사진 역시 사진의 순수한 가능성으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시각 수단의 하나로 실험되었다는 점에서 역시 그 순수성은 일단 부정적 입장에 서게 된다. 그들의 목적은 사진의 추상성이었다기보다 그들의 추상 예술에 이용할 수 있는 도구로서의 사진의 가능성이었던 것이다.
사진에서의 추상의 실험은 이들과 거의 같은 시기에, 그러나 바다 건너 쪽에서 이루 어지고 있었다. 알프렛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의 이퀴벌런트(Equivalent)가 그것이다. 알프렛 스티글리츠는 주지하다시피 미국 근대 사진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로, 사진을 근대 예술 양식의 하나로 확립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지도자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아무런 손질을 하지 않은 순수한 사진으로 사진의 예술성을 확립시킨 최초의 사진가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추상 사진의 문을 열어 놓았다는 것으로 그의 선구성을 추가하는 사람은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1922년 이후 스티글리츠는 구름을 찍기 시작했다. 이들 사진에 그는 '이퀴벌런트'란 용어로 그 의미를 규정해 놓았다.<사진> '이퀴벌런트'란 작가의 경험과 작품의 등가치성을 규정한 말로서, 은유로서의 사진, 곧 추상 사진의 첫 성공에 붙인 명칭이었다. 그의 구름 사진엔 구름이 찍혀 있었지만 구름의 어떤 특성, 또는, 구름에 대한 그의 생각을 나타내려 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이 사진은 종전의 사진과 그 궤를 달리한다. 종전의 사진은 소재나 소재에 대한 작가의 해석을 묘사, 표현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러나 이 사진에서의 소재는 단순한 하나의 형태로 동원된 중성적 존재일 뿐 표현 대상이 아니었다. 의미 부여를 기다리고 있는 원형질로서의 소재가 그 구름이었다. “그는 수백 점에 달하는 태양과 구름 사진들을 제작했다. 그는 이 사진들을 '이퀴벌런트'라고 불렀고, 비에 젖은 풀밭, 무릎 사이로 마주 비벼지는 여인의 손 등 그 내용과 수법에 있어서 또 다른 표현이 풍부하며 혼을 불러들이는 한 일련의 사진들과 함께 걸었다.
이 사진들은 사진적 추상이다. 그 사진 속의 형식은 무엇인가 보여 준다는 도해적 의미에서 추상되어, 즉,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이퀴벌런트'를 추상으로 보는 이유는 뉴홀(Beaumont Newhall)의 권위에 힘입어서가 아니다. 그도 지적했듯 '도해적 의미에서 추상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름이 구름으로서가 아니라 단순한 형태로 중성화되어 스티글리츠가 원하는 '음악'을 연주하는 음표로 전이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악보상의 음표 자체가 형태로서 무의미하듯 그의 구름 역시 무의미하다. 음표가 멜로디의 기호이듯 그의 구름 역시 내면 정서의 기호일 뿐이다. "그리하여 나는 구름을 찍기 시작했다. 몇 주일 동안 커다란 즐거움이기도 했다. 현상할 때마다 홍분에 싸였다. 지금까지 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것을 비로소 찾아내게 된 것은 아닐까 기대감에 싸여 매일같이 촬영을 했다. 정말로 가슴 졸이는 나날이었다. 무엇을 찾고 있는지 나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위대한 작곡가 어니스트 블로크에게 보이면, '음악! 음악! 이것이야말로 음악이야! 어떻게 이런 멋진 사진을 찍었지? '해가며 아마 그는 열중해서 바이얼린, 플루우트, 오보에 등을 써서 「구름」이라는 심포니를 쓰지 않고는 못 견딜 것이다. 드비시 같은 것이 아닌 보다 대작을 쓸 것이다. 그러는 동안 드디어 10장 정도의 엮음 사진이 만들어졌다. 이를 브록크에게 보여 주었다. 그러자, 지금 내가 쓴 그대로, 한 자 한 구 틀리지 않은 사태가 벌어졌다. 아무런 잔재주를 부리지 않은, 스트레이트한 사진뿐이었다. 어떤 시대의 사진가도 찍을 수 있는 사진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40년 동안에 무엇인가를 확실히 배웠다는 사실을 알고 만족했다.
그가 이토록 흥분한 까닭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한 마디로, 40년 동안 모색해 온 추상의 길을 찾아 낸 기쁨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을 예술로의 자립 가능성을 찾아낸 기쁨으로 해석할지도 모르나, 사진의 예술성에 대한 자신은 이미 <포토세션>시절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며, 「카메라 워크」, 「291 갤러리 등을 통해 사진의 예술성은 이미 공적 확인을 마친 뒤였다. 그가 사진의 추상성을 추구한 까닭은 쉽게 짐작이 간다. 당시까지만 해도 사진의 예술성에 의문이 제기되던 때였고, 이에 따라 일부 사진가들은 회화적 기법을 직접 도입하여 사진에 손질을 함으로써 예술성을 인정받고자 애를 쓰던 때였다. 그 예술성을 보장하는 가장 확실한 길을 사진의 추상성에서 찾았다고 볼 수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이듯, 사진을 통해 구하고자 한 최고의 이상을 음악에서 구했다는 사실은 음악의 추상성이 그가 추구한 이상이었음을 보여 준다. 사진이 음악의 경지를 이룬다면 그것으로 사진은 추상으로의 길을 연 것이 되고, 이는 사진의 예술성을 보장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것이다. 또한, 그가 경영하던 「갤러리 291」은 유럽의 추상 미술을 미국으로 들여오는 관문이기도 했다. 따라서 큐비즘을 비롯한 각종 유럽의 새로운 미술을 그는 이미 충분히 체득하고 있었다.
스티클리츠가 사진에서 추상을 추구하고자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퀴벌런트'는 소재에 중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내적 경험을 시각화하는 데 두고 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소재의 중요성은 훨씬 약화될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소재의 형태를 넘어선 곳에서 사진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이퀴벌런트'로서, '이퀴벌런트'란 사진의 추상성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인 것이다. 그로부터 '이퀴벌런트'란 용어는 하나의 사진 용어로 정착, 계승되었다. 이는 그에 의해 추상 사진이 하나의 사진 형식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한다. 스티클리츠의 또 하나의 성공이었다. 그러나 사진의 추상성에 대한 도전은 스티글리츠 이전에 이미 있었다. 회화성에 기탁해 예술성을 높이고자 한 의도도 따지고 보면 사진의 추상적 가능성에 대한 추구의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왜냐 하면, 당시 이미 대상의 객관적 묘사에서 벗어난 회화를 모방하여 사진 또한 대상의 객관적 묘사를 벗어난 곳에서 그 예술성을 추구하고자 했었기 때문이다. 연초점, 조립자, 고무인화법 등을 통해 인상주의 회화를 모방했다는 것은 사진의 재현성에 대한 부정으로, 재현성을 부정한다는 의식은 현실성, 사실성으로부터의 도피, 곧 추상성의 간접적 추구였다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구스타브 레일랜더 (Oscar Gustave Rejlander)는 한번 짚어 보고 넘어가야 할 존재가 아닌가 한다. 그의 합성 사진은 결국 사진의 추상성에 대한 그 나름의 추구였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가 사진을 합성한 것은 사진의 사실성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사실성의 벽을 뛰어 넘을 때 사진은 예술로 승화한다고 믿은 것이다. 그가 택한 주제가 종교화의 그것이었다는 것이 그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다시 말해서, 그의 합성의 목적은 상상의 세계에 대한 도전이었다. 상상의 세계를 사진으로 제시함으로써 사진의 사실성의 벽을 극복할 수 있고, 그것이 곧 회화와 동일한 수준에서 사진의 예술성을 보장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단순한 기계 이미지 자체로 예술이 될 수는 없다고 하는 당시의 부정적 사진관에 대한 그 나름의 저항이었고 방편이었다.
그와 같은 시대에 같은 합성 사진으로 사진의 예술성을 증명하고자 한 또 한 사람의 사진가 로빈슨(Henry Peach Robinson)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경우, 단순한 풍속화의 추구로서의 합성이었고, 사진 메커니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합성이었 다는 데서 레일랜더와 의미를 달리한다. 그에게서는 사진의 추상적 가능성에 대한 실험 의지를 전혀 읽을 수가 없다. 레일랜더가 상상의 세계를 다룸으로써 불가시의 세계를 가시화하고자 한 의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레일랜더의 합성 사진은 결과적으로 '위대한 졸작'이란 낙인이 찍힌 채 평가절하 되었다. 그의 방법론이 사진적 특성에 바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역사적 해프닝으로 돌려지고 말았지만, 그의 합성은 사진의 추상성에 대한 첫 시도로 재평가되어야 한다. 그의 실패는 합성이라고 하는 방법론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사진의 사실성에 대한 그의 몰이해가 실패의 원인이었고, 동시에, 그의 합성이 표현으로서보다 설명적, 나열적 차원에 머물렀다는 것, 다시 말해서 주제의 영상화에 실패했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는 그의 개인적 실패라기보다 사진 미학의 정립을 아직 기대하기 어려웠던 시대적 한계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것이 시대적 한계였다는 것은 1960년대에 이르러 율즈먼(Jerry N. Uelsmann)에 의해 확실하게 증명이 되었다. 율즈먼의 로빈슨과 함께 레일랜더에게 표한 경의는 그들이 개발한 합성 사진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던 데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 합성 사진이야말로 사진 단순한 재현성을 극복하는, 그리하여 외형을 넘어 추상을 이룩하는 길임을 그들의 사진을 통하여 깨우친 데 대한 정직한 답례였다. 결국, 레일랜더의 「인생의 두 갈래 길」은 위대한 졸작이 아니라, 위대한 출발이었다. 「Silver Meditations」, M&M 1975 에 실린 'Self-portrait as Robinson & Rejlander 1964.' 란 사진이 이를 증거한다.
초기 추상 사진을 생각할 때 스티글리츠 다음으로 빼어 놓을 수 없는 사람에 에드워드 웨스턴(Edward Weston)이 있다. "그는 대상과 작가 사이에 흐르고 있는 정서를 거부하고, 그것을 하나의 오브제로서, 형태 속에 숨은 생명력, 사물 자체의 정수를 캐어내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캐어 낸 것은 사물 자체의 생명력이라기보다 새로운 형태로서의 추상이었다. 왜냐하면, 사물을 클로즈업해서 극명히 묘사함으로써 사물의 현실적 의미가 사라지고 웨스턴의 개인적 시각에 의한 새로운 질서가 극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클로즈업을 통해 사물은 미세한 부분으로 절단된다. 절단된 부분은 전체성을 상실함으로써 현실적 의미에서 벗어나 독자적 질서 아래에 독자적 의미로 재구성된다. 그러면서도 사물 본래의 특성을 여전히 유지한다는 점에서 스티글리츠의 '이퀴벌런트'에 통하고 있다. 사진사가 뉴홀에 의하면 '이퀴벌런트'란 현실적 사물을 바탕으로 하되 그를 통해 작가의 비젼을 은유적으로 표현해 냄을 뜻한다. 설사 그가 스티글리츠의 영향을 직접 받지 않았다 해도 그의 사진적 근거가 '이퀴벌런트'에 있음을 보여 준다. 웨스턴을 스티글리츠와 묶어 초기 추상 사진의 한 유형으로 제기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퀴벌런트'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던 신즉물주의 사진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사물의 클로즈업이나 부분 확대 촬영 등이 많이 채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둘은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그들이 추상성이라든가 비현실성을 추구하겠다는 확고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채택한 방법론은 아닐지언정 부분 확대를 통해 극명히 묘사함으로써 사물을 현실성에서 벗겨 추상화시켰다는 점에서 그들은 공통된다. 이들이 서로 교류하였다는 증거는 아무 데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이퀴벌런트가, 유럽에서 신즉물주의 사진이 거의 같은 시대에, 같은 의도로, 같은 접근 방법을 보여 주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추상적 가능성에 대한 모색이 어느 한 사람이나 한 지역에서 한정적으로 이루어진 실험이 아니었다는 것은 시대가 이를 요구하고 있었다는 뜻이며, 그 시대적 요구가 하나의 징후로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고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추상사진에 대한 관심과 그 구체적 실현은 비록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해도 필요적 추세였다고 이해된다.
신즉물주의 사진을 초기 추상으로 다루는 이유는 신즉물주의 사진이 사물의 현실적 재현에 뜻을 두고 등장한 사진이 아니라는 데 근거한다. 그들이 사물의 현실적 재현에 뜻을 두고 있지 않았다는 증거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신즉물주의 사진에 강한 반발을 보였던 당시의 살롱 사진가들의 반론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이들 살롱 사진가들이 신즉물주의 사진의 예술성을 부정하면서 든 몇 가지 반론 중 가장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 것에, “모든 사실과 현상은 분리된 개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환경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관계를 나타냄으로써 인간과의 관계가 성립된다. 즉 물적 사진처럼 물상의 단편이 고립되어서는 단순히 형태를 보여 주었다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라는 부분이 있다. 이들의 비난은 신즉물주의 사진가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이 현실성, 재현성에 있지 않음에 대한 것이었다. 현실성, 재현성이 무시된 사진이 추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사진의 추상성이거나 적어도 그 언저리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 신즉물주의 사진가들은 거기에 머물고 말았다. 사물에 대한 인식의 한 단면을 보여 주었을 뿐, 사진의 더 먼 지평까지 열어 주지는 못하였다. 이 또한 시대적 한계로 생각되거니와, 신즉물주의 사진을 '이퀴벌런트'와 함께 추상 사진의 초기 형태의 하나로 다루는 것은 그 때문이다.
추상 사진의 전개
사진의 추상성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1950년을 전후해서다. 1920년대의 초현실주의 예술 운동이 사진에도 영향을 주어 만 레이를 비롯한 몇몇 사람의 실험적 작업이 있었지만, 그 이상의 진전을 보이지는 못하였다. 잘했더라면 그 시대를 획으로 해서 사진은 일대 전기를 맞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20년대로부터 40년 전반기까지는 전쟁의 시기였다. 때맞추어 등장한 소형 카메라에 힘입어 사진은 현실을 집중적으로 다루게 되었다. 현실은 종전의 다른 예술 매 체들이 제대로 손을 대지 못해 남겨 놓은 신선한 영역이기도 했다. 거기에 전쟁이 겹쳤다. 전쟁은 사진이 아니고서는 그 처절한 아름다움을 과시할 수 없는 드라마였고, 전쟁으로 해서 사진은 시대의 총아로서 각광을 받으며 그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가 있었다. 사진이 나름대로의 깊은 성취감과 높은 완성도를 보인 것도 이 분야에서였다.
기록성에서 그 능력을 과실할 수 있었던 사진이 추상적 가능성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음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50년대에 이르도록 추상 사진이 그 모습을 쉽게 보이지 못했던 것은 이러한 시대 상황에 연유한다. 아론 시스킨드(Aaron Siskind)는 원래 다큐멘터리 사진가였다. 그러던 그가 추상적 사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44년경 뉴잉글랜드 지방의 어느 어촌에서 썩은 밧줄이며 버려진 장갑, 죽은 생선 따위에서 내면적 드라마를 읽으면서부터였다. 그의 출발이 다큐멘터리 사진이었고, 그가 44년 새로이 발견한 물체들에 대한 관심이 또한 기록에서 출발하고 있다고는 해도, 그의 기록은 과거의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그것과는 분명 달랐다.
대상이나 문제 제기가 과거의 공론적 관점에서 개인적 관점으로, 사회적 문제에서 개인적 관심사로 바뀌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그의 대표적 작업이자 일관된 작업인 벽의 사진은 그 출발이 기록이었다 해도 그 사진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메시지는 분명 현실적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 관심이 발견한 새로운 질서였다. 더구나 그 메시지는 언어화가 가능한 문학적 의미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다. 같은 시기에 비슷한 작업을 한 사람으로 해리 캘러헌(Harry Callahan)이 있다. 그 역시 현실의 기록에 그의 사진의 출발점을 두고 있다. 그러면서도 현실에 대한 관심이 현실적 문제에 있지 않고 새로운 질서로서의 형태의 탐구에 있었다는 점에서 시스킨드와 유사함을 보인다. 그의 이미지 역시 문학적 의미로는 읽혀지지 않는다. 이 둘은 우연치 않게 직장도 함께 했던 인연까지 겹쳐 언제나 함께 다루어지고 있다. "이들 두 사람(에드워드 웨스턴과 브렛트 웨스턴)의 사진보다도 같은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일부의 미국인 사진가들의 작품 쪽이 현재의 회화의 경향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이 그룹의 대표적 존재가 아론 시스킨드와 해리 캘리헌으로. 그러나 이 두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 추상은 회화적 추상의 추종이었다.
게른샤임의 지적은 이들의 사진이 다큐멘터리의 전통에서 먼 것임을 가리킨 것이지만, 동시에, "현재의 회화의 경향"이란 말은 이들 사진의 추상성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게른샤임의 지적처럼 이들의 추상은 회화적 모방에 불과했다. 비록 사진의 전통적 수법을 충실하게 지키고는 있었지만,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은 회화적 추상의 사진적 실현이었다. 우리가 회화에서 익히 보아 온 추상적 형태를 사진으로 제시한 데 지나지 않을 뿐 사진 독자적 미학으로 이룩한 추상은 아니었다. 결국 이들은 사진으로도 가능한 회화적 추상을 보여 준 데 지나지 않았다. 사진 독자적 추상성 확립의 전단계로서의 추상으로 이들의 사진을 규정짓는 근거를 여기에 둔다.
"사진술과 추상 예술의 관계에 근접하고 있다. 또한 이 관계는 사진가로서 도전해 볼 만한 것이다. 저토록 분명 반길 만하지 못한 소재들 - 하나의 지붕 판자나 자국난 타르 종이 같은-을 시스킨드처럼 한 사각형 내부에 조직하고 고립시키는 것이 그 가장 가까운 보기이다." 뉴홀도 지적하고 있듯 시스킨드의 사진은 추상에 근접하고 있지 추상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이 또한 시대적 한계였다. 소위 발전은 그 단계를 밟는 것이 역사적 순리라는 것,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바탕으로 그 후 얼마 안 가서 결국은 사진적 추상의 정립을 보게 된다는 것 등에서 그러한 단정은 가능하다.
이러한 회화적 추상에서 사진적 추상으로 가는 길목에 그 징검다리 구실을 한 사람으로 윈 벌록(Wynn Bullock)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윈 벌록은 처음 포토그램 등을 이용한 추상적 사진 작업을 하였다. 그러다가 에드워드 웨스턴을 만나면서 그의 사진은 커다란 방향 전환을 하게 되었다. 사진의 정밀한 묘사력을 바탕으로 한 순수 사진에서 사진의 진정한 예술성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웨스턴은 하나의 계기였지 신앙 대상은 아니었다. 그는 웨스턴으로 해서 깨우친 정통적 사진 미학을 바탕으로 독자적 영역을 개척해 내었다. 그것이 추상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진 '빛의 사진'이다. '빛의 사진'이란, "아직 정의되지 않은 감각에 의해 지각되는" 제4차원 세계의 시각화에 사용된 그의 접근 방법에 붙여진 명칭이다.
무엇보다도, "아직 정의되지 않은 감각에 의해 지각되는" 세계야말로 그대로 추상적인 세계일 수밖에 없다. 아직 해명되어 있지 않은 감각으로나 겨우 감지될 뿐인 세계란 우리의 오관으로 감지 가능한 현실은 적어도 아닐 것이다. 그러한 세계를 그는 빛으로 구체화시킬 수 있다고 믿은 것이고 그를 실제로 증명하고자 했다. 추상에 관한 그의 관심은 다음 글에서도 보인다.
“최근의 추상 사진에 대해서 내가 특히 중요한 관심을 가지고 흥미를 느끼는 것은 마이너화이트, 월터 채플, 그리고, 아론 시스킨드 등의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진을 추상 사진의 완결형으로 보지 않는 것은 그의 사진이 과거의 문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데서 온다. 사진이 지향해야 할 지평을 느끼긴 했지만, 그리고 나름대로의 방법론을 개척해 일단의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가 다루는 소재는 모두가 소재 자체의 원초적 의미 그대로 등장하고 있다. 제2, 제3의 의미로 전화되든지, 적어도 충분히 소화되어 있지 않고, 소재 자체가 완벽한 모습으로 재현되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추상 사진에서의 소재의 의의는 소재가 주제에 의해 완전히 융해되어 그 형체가 본래의 의미에서 분리된다는 데 있다. 소재가 소재의 본래적 의미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현실 재현에 그 목적을 두고 있는 근대 사진의 테두리에 머물고 있음을 뜻한다.
그의 '빛의 사진'이 4차원의 불가시 세계를 시각화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사용되기는 했다. 그러나 이들 사진이 보여 주고 있는 세계는 현실을 바탕으로 현실 속에서 느껴지는 제6감의 세계에 대한 암시요 상징이었지 추상은 아니었다. 제6감을 시각화하고자 했다는 데서 추상적 의지를 읽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그대로 추상 사진이 될 수 없음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소재의 재현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데서 온다. 그의 만년, 70년대의 작품에서 추상적인 사진을 많이 볼 수 있으나, 이들 역시 스티글리츠의 '이퀴벌런트'를 바탕으로, 에드워드 웨스턴의 한계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의 초창기 사진이 포토그램이나 솔라리제이션 등의 기법을 이용한 추상적 사진이었다는 점은 그의 만년의 추상적 사진과 연관되어 주목된다. 처음부터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사진으로 이룰 수 있는 추상적 세계였고, 생애를 걸쳐 줄곧 추구한 것 역시 사진의 추상성이었고, 끝으로 남긴 것 역시 추상적 사진에 관한 실험이었다고 말해서 큰 잘못이 없을 것이다. 원 벌록은 사진이 추상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진 또 하나의 이정표였다.
추상 사진의 완성
원 볼록과 같은 시대에 살면서 원 벌록과 유사한 감성으로 작업을 한 마이너 화이트(Minor White)에 이르러 추상으로서의 사진은 하나의 완결된 형태로 나타난다. 특히, '빛의 사진'이란 점에서 둘의 사진은 퍽 근접한 감성을 느끼게 해 준다. 화이트가 따로 빛의 사진이란 말을 의식적으로 쓰지는 않았지만, 화이트의 추상 사진은 실상 이 빛과의 관계에서 성립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빛이 무엇인가 만들어 낼 것이라고 예감을 한 사람이 벌록이었다면 계시를 받은 듯 확실하게 광합성 섬유로 옷을 짓기 시작한 사람이 화이트였다. 화이트에게 있어서 빛은 영상 형성을 위한 단순한 광학 매체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의 빛은 그 자체로서 어느 소재보다도 중요한 소재였다. 다른 사람의 사진에서 빛을 빼어내면 단순한 물체가 초라한 모습으로 남겠지만, 그의 사진에서 빛을 빼어 버린다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의 빛은 그의 사진의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빛이 그의 사진에서 특히 추상화와의 연관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데 있다.
첫째로, 소재의 원초적 의미를 빛이 바꾸어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빛의 의미를 깨닫고 이를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에 걸린 시기였다. 이 때의 빛은 그의 소재를 녹여서 새로운 형태로 바꾸어 내는 용광로 같은 존재였다. 동원된 모든 소재들이 빛에 의해 그 원초적 의미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이미지로 화한다. 사물이 본래의 의미를 떠났다고 하는 것은 사물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개념, 관념으로부터의 일탈을 뜻한다. 보편적 개념에서 일탈한 이미지가 구체적 현실을 창조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몽환적 초현실 세계가 그가 추구하는 바가 아님은 그의 영상의 명징성에서 알 수가 있다. 결국 그가 천착하고 있는 바, 그의 작품 세계는 현실에서의 추상의 발견과 그 창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당시의 대표적 사진의 하나로, 유리창에 엉긴 성에를 찍은 62년도의 작품이다. 성에라는 것은 자세히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성에는 이 사진의 성공 여부 또는 제작 목적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성에의 제1의, 본래의 의미는 이 사진에서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이 사진에 동원된 소재는 완전히 해체된 상태에서 새로운 의미로 재조직되고 있다. 그 해체와 재조직을 맡고 있는 것이 이 사진에서의 빛인 것이다. 이 사진은 소재의 원초적 의미를 통한 현실적 질문이나 해답이 그 목적이 아니다. 이 사진은 추상적인 명제의 시각적 형성일 뿐이다.
둘째로, 빛조차도 전도시켜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 미묘한 탈사실성이다. 빛이란 원래가 밝은 것으로 흑백 사진에서 흰색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의 빛은 검은 색이라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빛이 검게 나타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의 사진의 주조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백색이 아니라 흑색이다. 50년대 중반에 집중적으로 제작된 적외선 사진에서도 강렬한 백색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백색에 대조되어 흑색이 그 못지않게 강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흑색이 기조를 이룬다는 사실은 양각이 아닌 음각에 의존함을 뜻한다. 흑색이나 음각이 추상적 기호임을 증명하기 위해선 별도의 자리가 마련되어야 하겠지만, 현실의 전도, 변이임은 별도의 증명 없이도 이해될 것이다. 작화를 하는 데 있어서 그의 사진 화면을 차지하는 흑과 백의 화조 배분율은 자연히 흑이 주조를 이루고 백은 보조적인 것이다. 이 사실은 다른 사진가들과 전혀 입장을 달리 한 것이다. 이러한 작화상의 반대되는 입장은 그의 내면적인 인식 구조가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지각된 의식 세계로부터가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를 기반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며, 신비학적 측면에서는 지적 인식으로부터가 아니라 지적 인식의 한계 밖에 신의 영역으로부터 인식 행위를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의 사진의 주조를 이루는 흑색이 무의식의 세계, 신의 영역에서 온다는 육명심 교수의 지적은 그의 사진의 추상성과 함께 그 추상성이 흑색을 바탕으로 해서 형성되는 것임을 아울러 암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마이너 화이트의 사진을 추상 사진의 완결형으로 보는 까닭은 간단하다. 무엇보다도 그의 사진이 현실의 재현에 그 목적을 두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윈 벌록의 사진 역시 그렇기는 하다. 그러나 벌록이 사물을 현실적, 재현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에 비해 화이트는 사물의 현실적 의미에 구애받지 않고 자의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사진이 추상으로 가는 길목에서 걸리는 가장 큰 장애가 소재의 현실적 존재감이다. 음악이 현실적 사물과 아무런 관계가 없고, 추상 회화가 구체적 소재에 구애받지 않음에 비해 현실적 소재의 간섭 없이 영상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사진은 그만큼 사물의 구체성에 묶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소재의 구체성을 특히 빛을 통해 극적으로 극복한 것이 그의 사진이다. 하필 빛이 아니라도 그의 방법론을 통하면 언제나 사진은 추상에 이를 수 있음을 그가 실천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추상 사진의 한, 완결형으로 보는 것이다.
추상 사진의 또 하나의 전형을 랄프 깁슨(Ralph Gibson)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그의 출세작으로 알려진 사진집 「몽유병자(SOMNAMBULIST)」를 비롯해서 「기시체험 DEJAVU)」, 「바다에서의 나날(DAYS AT SEA)」들에서 우리는 언어 밖의 세계의 실체를 표본적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언어로는 표현 불가능한 시각적 체험의 고백을 그의 사진에서 들을 수가 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문학적 체험에 한한다. 그러나 우리의 체험은 문학적으로 서술될 수 없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것을 감지해 적극적으로 영상화시키고 있는 것이 현대 사진이거니와, 랄프 깁슨의 영상에서 우리는 언어화가 불가능한 체험의 영상적 서술을 읽을 수 있다. 마이너 화이트에게서도 그러한 체험은 할 수 있지만, 그의 이미지는 보다 회화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보는 이는 회화적 체험을 한 것으로 착각할 수가 있다. 깁슨의 경우라 해서 회화적이 아니라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깁슨에게서는 시각적 밀도보다 초현실적 환상이 진하게 감지됨으로 해서 현실을 넘어서는 추상성을 보다 진하게 경험하게 된다.
그의 사진의 추상성은 프레이밍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현실성은 시간과 공간의 일치에서 찾아진다. 어느 한쪽이 앞서거나 한 쪽만이 강조될 때 현실성은 의미를 잃고 추상화된다. 깁슨의 사진은 공간이 시간보다 강하게 자기 주장을 하는 사진이다. 현실성을 무시한 대담한 프레이밍이 그의 사진의 공간성이다. 인물 사진의 경우를 보더라도, 인물의 성격은 물론, 인물로서의 존재성조차 완전히 무시하는 프레이밍이 인물을 현실성에서 벗겨 추상화시켜 준다. 시간 역시 그의 사진에서는 현실을 벗어나고 있다. 깁슨의 사진에서는 시간이 프레임에서 현실성을 빼어 버리는 역할을 맡고 있다. 사건 이전이거나 그 이후를 암시할 뿐 시간이 사건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사건 직전의 긴장감을 다룬 것이 많이 보이는데, "내 사진은 대체로 사건의 '주변'에 스포트가 주어져 있다. 나는 역사적 사건의 기록에는 흥미가 없다. 내게 있어서의 대사건이란, 인식의 명확한 지각으로까지 높아진 순간, 짧기는 해도 강렬한 일순간의 일이다. 그 순간에는 방 한 구석, 의자 등 평상시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물의 미세한 부분, 그들 전부가 피사체가 될 수 있다"
"인식이 명확한 지각으로까지 높아진” 짧기는 해도 강렬한 순간의 긴장감이 그의 사진의 시간성이다. 그렇다고 그 긴장감이 현실적 서스펜스로 설명되어지지 않는다는 데에 이들 사진의 묘한 불가사의성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마이너 화이트와 랄프 깁슨의 사진이 둘 다 흑색을 그 기조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깁슨의 경우, 때로 흑색 속에 부각된 백색이 긴장감을 조성하는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흑색을 의식적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둘은 일치하고 있다.
“1979~80년에 걸쳐 나는 <블랙 시리즈>를 만들었다. 혹색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 작품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블랙 시리즈>라 이름한 것이다." 흑색이나 백색은 실질적으로 "색"이라기보다 “빛”이라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결국 이 두 사람이 모두 빛의 사진가라는 사실이 된다. 윈벌록의 빛의 이론이 지향한 바가 이들에 이르러 완결을 보았다고 해서 무리는 없을 것이다. 깁슨의 사진에는 또 시각적 형태가 이루는 추상성이 많이 보인다. 기본적으로 선이라든가 면 등의 공간 감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그의 추상은 단순한 기하학적 구성에서 벗어나 심리적 반응까지도 계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캘러헌이나 시스킨드의 시각성과 그 궤를 달리 한다. 그의 사진은 겉으로 드러난 형태를 넘어,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심리적 반향까지 산울림처럼 이끌어 내고 있다. 특히, 양쪽 페이지를 하나의 공간으로 삼아 그 한 공간에 두 개의 다른 이미지를 섞을 때 일어나는 이미지를 증폭, 내지는 제3의 이미지까지 그는 정확하게 계산하고 있다. 이미지 밖의 이미지까지 계산에 넣어 추상화시켜 내는 흥미로운 보기의 하나일 것이다.
이 밖에도 사진의 추상적 가능성을 진지하게 추구한 작가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화이트의 후계자로 알려진 폴 카포니그로(Paul Caponigro)가 그렇고, 시각의 확장 에서 추상을 모색한 메츠커(Ray K. Metzker)가 그렇다. 바바라 카스텐 (Barbara Kasten)의 구조적 컬러 사진, 그루버 (Jan Groover)의 포크와 나이프의 이미지가 그렇고, 미트야드(Ralf E. Meatyard), 로린(Clarence J. Laughlin), 그리고 제리 율즈먼, 트레스(Arthur Tress) 등이 그러한 작가들이다. 쉽게 말해서 추상적 이미지를 거치지 않고 현대 사진은 성립이 안 된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를 일일이 열거하여 논증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이 글의 목적이 작가 개개인의 추상성 검증이 아니라 추상 사진의 발전 경로를 살피는 데 두고 있기 때문에 이들 두 사람의 검증으로 여타의 작가들의 경우는 생략하기로 한다. 이들 두 사람의 사진을 추상 사진의 대표적 경우로 꼽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이들 두 사람은 모두 언어 밖의 세계를 영상화하고 있다는 점, 시각으로 밖에는 전달이 되지 않는 의미 아닌 의미, 곧 시각적 의미를 영상을 통해 제시해 주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는데, 그러기 위해 소재 역시 현실적 의미를 벗겨 내어 제2, 제3의 새로운 의미로 재구성함으로써 현대 추상 사진의 완성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
둘째로, 이들 두 사람 이외에도 추상 사진의 더 좋은 예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이들 두 사람이 가장 성공적인 경우라 본 것인데, 이들은 이미 사진사적 수준에서 거론되고 있는 중량급사진가들이어서, 여타의 사진가들에 견주어 표본적 가치가 높다는 점,
세째로, 화이트는 심리적 추상의, 깁슨은 형태적 추상의 전형을 보이고 있다는 점으로, 대개의 추상 사진이 이들 중 어느 하나에 속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화이트가 심리적이라 해도 문학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있다는 점, 깁슨이 형태적이면서도 시스킨드식의 회화적 인용에 그치지 않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19세기적인 회화성에서도 또 근대 사진의 문학성에서도 벗어난 현대성을 이들이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이 사진이기 위해서는 사진에서 대상이 사라져야 한다. 우리가 사진을 보고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언제나 대상이지 사진이 아니다. 우리가 사진을 본다고 생각한 것은 실은 사진이 아니라 그 대상으로, 일종의 착시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에 대상이 너무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사진 그 자체보다 늘 대상이 눈 앞을 가린다. 사진이 사진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진 위에서 대상이 사라져야 한다. 적어도, 대상의 형체가 약화되어 대상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아야 한다. 대상이 눈에 띄기보다 사진이 눈에 띄어야 한다. 그 때 사진은 비로소 사진으로 존재하게 된다. 사진의 추상화란 대상의 존재성을 사진 위에서 지워, 사진 그 자체를 제시하는 작업을 일컫는다. 우리로 하여금 대상이 아니라 사진을 보게 해 주는 것, 그것이 사진의 추상화 작업인 것이다.
과거의 사진은 사진에 찍혀진 대상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작업이었다. 사진 본래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작업이 아니었다. 사진 본래의 모습은 대상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서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제, 사진은 사진 본래의 모습을 찾는 일을 진지하게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림이 캔버스 위에서 대상을 추방함으로써 존재 의미를 찾았듯 사진도 인화지 위에서 대상을 추방함으로써 사진의 존재 가치를 새로이 찾아야 한다. 그림이 대상을 지워 버리면서 등장한 것이 추상 회화이듯, 사진에서 대상을 지워 사진성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작업이 사진의 추상화 작업이다. 사진의 추상화 작업은 사진의 진면목 회복 운동이다. 대상을 넘어선 곳에서 그 존재 가치를 추구하는 작업인 것이다. 사진에서 추상화 작업이 의미를 갖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진의 추상화 과정을 추적해 본 이 글의 의미도 여기에 있다.
이 글은 사진의 추상화 과정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그 추상 사진의 전형을 추출해 보려는 데 뜻을 두었다. 그 커다란 줄기를 찾는다고 때로 뜻하지 않은 착각이나 오류를 범한 일이 있을지 모른다. 이러한 착각이나 오류는 기회를 두고 바로잡을 생각이지만, 그러한 오류를 일단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이는 <거울과 창>을 엮은 존 샤카프스키(John Szarkowski)에게서 빌어온 칼이긴 하지만, 조심스러운 성공보다는 과감한 실패가 이 글의 목적 달성에 유리하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사진의 진면목이 어떠한 것인지 아직은 모른다. 추상화 작업은 이제 막 완성을 본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의 발명으로 쫓기던 회화가 인상주의로 돌파구를 열 때 아무도 현재의 회화를 예측하지는 못했다. 마찬가지로 이제 추상화를 막 이루어 낸 사진의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는 없다. 회화가 대상을 벗어나면서 오늘은 이루었듯, 사진도 대상을 벗어던짐으로써 그 미래를 약속받을 수 있다는 것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사진의 추상화 작업은 이제 겨우 그 완성형을 본 데 지나지 않는다. 추상 사진은 이 제부터가 시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엔 논의되어야 할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다. 이를테면, 인벤션 포토를 '순수 추상 사진'과 분리하는 근거를 보다 과학적, 논리 적으로 정립하는 일 따위의 세부적 사항에서부터, 추상 사진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이며 필요한 것인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 나아가 추상 사진을 어떻게 미학적으로 정의할 것인가 하는 원론적 문제 등등이다. 그러한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론은 쓰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제 사진은 다시 한번 변신하는 기회를 맞이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추상 사진에 관한 온갖 논의의 계기로 이 소론을 제공하고자 한다.
1989년 '밝은 방'에서, 한정식
외로운 길
내가 스물한 살이 되던 새해 첫날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내 시 '포플라'가 가작으로 입선하여 발표가 되었다. 그 시 자체는 지금 보아 별것 아니지만, 그리하여 당선이 아닌 입선에 그친 것이지만, 그 일이 내게 미친 영향은 컸다. 무엇보다도 내가 인간적으로 조금 더 자랄 수 있었던 한 계기를 만들어준 사건이기도 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그 시는 내 정체성의 일면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당시 그 시를 선정해 주신 분이 조지훈, 노천명 선생이셨는데 조 선생님의 심사평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 시 한 편을 보시고 내 사람됨을 짚어 주신 말씀이었는데, 어떻게 그 짧은 시 한 편으로 나를 그렇게 정확히 보셨는지 어린 나였지만 마음 한구석이 뜨끔했었다. 요컨대 "이 사람은 인생의 따끔한 맛을 좀 봐야할 것 같다"는 뜻으로 기억하고 있다. 때는 1957년, 38선이 휴전선으로 바뀐 지불과 3, 4년밖에 안 되던 시점에서 어찌 이리 한가하고 순진한 시를 쓰고 있을까 하는 한탄이 섞인 말씀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게 바로 나였다. 그리고 '나'이다. 나는 퍽 현실적이었지만, 실제로는 현실성이 결여된 사람이었다. 현실적이라는 것은 어렸을 적 집안이랄 것도 없는 것이, 어머니와 나 단 둘이었으니) 워낙 어려워서 우선은 먹고 살아야 한다는 의식이 철저해 모든 일에 언제나 현실적으로 대처하려 애를 썼다. 그러나 실제로 부딪쳐 보면 나는 늘 현실과 동떨어진 곳에서 어리석은 짓만 골라 하고 있었다. 먹고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늘 놓지 못하고 있었음에도 택한 길이 시였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 주는 것이 아닐까. 그게 나였고 아직까지도 바뀌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이다. 한마디로 실제에 당해서는 늘 현실성이 모자랐는데, 그게 우선 현실과 부딪치는 것을 퍽 부담스러워 해서였다. 남들과 부대끼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것이 늘 싫었다. 그러나 그래서도 오히려 때로는 용감하게 직접적으로 돌파도 해 왔으나 끝내는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것이 내 속마음이었다. 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퍽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사람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나를 조금 더 아는 사람들은 내가 실은 내성적인 성격임을 알고 있다. 다만 내 사고방식이 긍정적이고 비교적 건전하고 밝은 성격이어서 많은 일들을 그렇게 대처해 왔기 때문에 나를 퍽 활동적이고 진취적인사람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소위 다큐멘터리 사진을 않는 까닭, 아니 못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현실을 떠난 사진은 자칫 공허해지기 쉽다는 것, 그리하여 사진의 정체성을 기록성에서 찾고 있다는 점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은 하면서도, 현실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쪽으로는 눈이 가지 않았다. 사진에 입문했을 때, 임응식 선생께서 늘 사진의 기록적 가치를 강조하시던 말씀을 들으며 공부했고 그래서 한때는 그런 사진도 해 보았지만, 결국은 그것은 내가 갈 길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향한 내 눈길은 삶의 깊은 골짜기가 아니라 높이 뜬 흰 구름이었다. 내 '나무'가 그래서 나왔고, '고요' 시리즈가 결국은 거기에서 나온 것들이다. 나는 현실에 살면서도, 그리고 비교적 적응을 잘해 잘살아 왔으면서도, 마음은 늘 현실을 피하고만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택한 것이 순수사진(흔히 '예술사진'이라 일컫는)이었다. 삶의 현장을 벗어나면 그것은 자연 풍경일수밖에 없다. 풍경도 현실이요. 따라서 풍경을 찍는 것도 기록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치열한'삶의 현장'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기록만 하는 일상적 풍경사진에 만족할 수는 또 없었다. 그리하여 단순한 외형적 풍경에서 벗어나 내면 풍경으로 향하다 보니, 쉽게 말해서 ‘사진적 추상'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사진적 추상'이라는 말이 조금 생소할 수도 있으나 '추상사진'이라는 말로 바꾸면 조금 이해가 쉬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추상사진'이라면 추상화를 모방한 사진을 연상시키기 쉬워 '사진적 추상'이라고 말을 바꾸어 본 것인데, 사진이 아류 회화일 수는 없는 것이고 따라서 추상화를 모방하는 것은 사진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사진만이 할 수 있는 추상의 경지, 다른 매체들과는 확연히 다른 추상을 사진으로 이루고자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진적 추상'의 필요성은 무엇일까? 더구나 사진은 구체적 형태를 재현하는 데에서 출발하는 매체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으로 해서 사진의 기록성이 운위된 것이고, 기록성이야말로 사진의 존재이유요, 가치라는 것이 정설임을 인정하면서도 왜 하필 추상일까?
여기에서 '사진적 추상의 필요성이나 당위성을 장황하게 설명할 생각은 없다. 이미 발표한 저술이나 글을 통해 몇 번 설명한 바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사진의 추상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사진의 주제theme라는 것이 추상적 개념 관념이기 때문에 사진에서도 추상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만 밝히고자 한다. 특히 순수사진의 경우 추상성은 거의 필수적 요구라 해서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 더 현대와 구분되는 근대사진의 시기는 물론, 아직까지도 사진의 대부분은 문학성에 기대고 있음이 사실이다. 작가나 관중이나 모두들 사진의 '의미'에 매달리는 것이다. 특히 문학적 의미에 매달려 사진이 뜻하는바 내용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따진다. 그러나 이 '의미'라는 것은 문자예술의 영역이지 비문자 예술의 영역은 아닌 것이다. (박이문, 시와 과학 비문자 예술에도 의미라는 것이 있을 수 있고, 있어야 하겠지만, 그럴 때의 의미란 문학적 의미, 곧 언어로 풀이되고 언어로 이해되는 의미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것이 언어로라야 표현, 전달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 전달이 되지 않는 의미가 이 세상에는 더 많이 있음을 흔히들 간과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음악, 풍경 같은 청각적, 시각적 경험은 물론이요, 시각도 청각도 아닌 감정과 같은 내적 경험은 도저히 말로는 풀어낼 길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매체가 생긴 것이다. 미술이, 음악이, 무용이 그래서 생겼고, 사진이 그래서 발명된 것이다. 이렇게 '언어 밖의 세계'는 무한하다.
이것이 말하자면 내가 사진에서 추상을 지향하는 참된 이유인 것이다. 이 광대무변한 영토에 무관심할 수가 없었고, 그리하여 이 '언어 밖의 세계', 사진으로라야 표현 가능한 광막한 영토 개발에 발을 내디디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완성했다고는 감히 생각지 않는다. 내가 시도한 방법론이 유일하다든가 최선이라는 것 역시 아니다. 이를 시각화, 영상화하는 길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작가들의 몫이고 나는 내가 생각하고 추구하는 길을 그저 가고자 할 뿐이다.
신춘문예 입선 통지서를 받고 신문사로 나가 보니 문화부장이 입선 소감을 써내라고 내게 원고지 서너 장을 건네주었다. 원고지를 받아들고 신문사 옥상으로 올라갔다. 실은 전날 밤에 입선 소감을 뭐라고 써야할까 생각하노라고 밤을 새우다시피 했지만, 삐걱 삐걱, 옥상으로 향하는 목조 계단을 다 오를 때까지 한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다. 원고지를 앞에 둔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부연 하늘뿐이었고 머릿속은 하얗기만 했다. 망연히 서 있을 수만도 없어 초조해 하던 중에 그래도 어쩌다가 한 줄이 떠올랐다. 다음에는 무슨 말을 썼던가 거의 기억에 없지만 맨 첫 구절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외로운 길인 줄은 잘 안다."
당시만 해도 시를 쓴다는 것은 소위 '밥 굶는 길'이었다. 시만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것 자체가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게 내 운명이었던 모양이다. 이후 나는 한 번도 큰길로 나서 본 기억이 없다. 시를 쓰다가 모자라는 능력을 깨닫고 문학이고 예술이고 다 포기하고 그때부터 담배 배우고, 화투도 치며 놀다가 우연히 들어선 길이 사진이었다. 인생에 우연 아닌 일이 몇이나 될까만, 사진과의 만남도 전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우연이었다. 나이 서른쯤 되어서의 일이었다. 그러나 들어서 보니 사진은 시보다 더 외로운 길이었다. 사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때였다. 물론 임응식, 이명동 선생을 비롯해 사진계 선배 몇몇 분이 남들의 시선 의식 않고 진지하게 사진을 하고 있었지만 일반적 인식은 물론이요 미술계를 비롯한 문학이나 음악 등 타 분야에서도 사진은 그냥 판박이 기술이지 예술은 아니라는 인식만이 팽배해 있었다. 그리하여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외로운 길'로 나도 모르게 또다시 들어선 것이다.
그뿐 아니라 내가 택한 소위 '순수사진'이라는 것이 사진 중에서도 또 외로운 길이다. 인간의 삶을 추구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이 사진의 중심이라는 인식으로 해서 내가 택한 순수사진은 사진의 변두리로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의 역사에 남은 세계적인 작가들 대부분도 이 다큐멘터리 작가들로, 사진의 순수성(예술성)을 추구한 작가들은 손가락으로 꼽아야 할 정도로 적다. 수의 적고 많음이 무슨 문제일까만 그 까닭이 결국 사진의 정체성, 존재 이유와 이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하여 사진의 또 다른 정체성,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추상성을 추구하는 내 작업은 다른 외로운 길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줄을 알면서도 이 길을 택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한마디로, 걷다 보니 저절로 오게 된 길, 내심성이 찾은 길이다 보니 이것도 다 팔자인 모양이다. 시에서 풀지 못한 한을 사진에서 풀어 보자는 앙심을 품어 본 적도 없다. 내 마음속에서 솟아오른 샘이 내를 만들고 강을 이루어 바다로 향하는 그런 간절한 목마름일 뿐이다. 그러나 이왕 들어선 길, 첫눈 내린 길에 새로운 발자국을 내고 싶은 마음으로 '남들이 돌아보지 않는 외로운 길을 묵묵히 걷고 있다.
2017년 4월 '밝은 방'에서, 한정식
사진과 현실, 사진의 정체성을 찾아서
두 가지 걱정이 앞섰다.
첫째는 이러한 논의를 지금에 와서 과연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사실 고요 III 책을 구상한 것은 십 년쯤 전의 일이었다. 당시 한국 사진계에 소위 '만드는 사진'이 열병처럼 번지고 있었다. 특히 일부 젊은 사진가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사진이 '새로운 사진'으로, 종전의 스트레이트한 사진은 낡은 사진으로 받아들여지는 느낌까지 있었다. 사진으로 반생을 살아온 입장에서 이것은 문제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코 기성세대의 권위 훼손 우려의 차원이 아니라, 사진 미학적 입장에서의 우려였다. 머릿돌이 바로 앉아야 집이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 '만드는 사진'이라는 비학술적 용어로 불리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름으로 등장한 '구성사진'은 결국 한때의 유행에 지나지 않는다. 여인들의 치마 길이와 그 근본에서 별로 다름이 없는 것이다. 모더니즘의 다음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면 그 다음에는 또 다른 '이름'이 나올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러나 세상을 보는 관점이 어떻게 바뀌든 물은 물이 산은 산이다. 이름에 관계없이 근본적으로 사진은 사진일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는 시의에 묶이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더구나 한국 사진계에서 이러한 논의가 진지하게 있어 본 적이 없었다. 이미 있어야 했던 일을 이제야 한다는 자책감이 앞서기도 했지만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바로 시작할 때라는 속언을 빌려 일단 쓰기로 마음을 굳혔다.
두 번째 걱정이 내 지적 수준의 문제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안고도 나는 이미 몇 번이나 일을 저지른 바 있다. 글만이 아니다. 작품이랍시고 발표한 내 사진들이 이러한 어리석음을 여실히 보여준 것 같아 지금도 모골이 송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이런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것은 이나마라도 우리 사진학계에 자그마한 도움은 되지 않을까 해서이다. 심도 있고 고매한 이론은 후학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그 수준으로 올라가기 위한 사람들의 받침돌이 되는 것도 뜻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헛소리는 하지 않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할 말은 하되 지나치지 않고, 독단이 되더라도 논리적 합리성을 갖추고자 노력했다. 설득하고자 하는 열의만이라도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막상 책을 쓰게 되자 또 한두 가지 고민이 생겼다. 사진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룬다고 사진 교과서로 만들어 평면적인 서술을 하기는 싫었다. 더구나 사진을 전면적으로 모조리 검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마치 인생론 우주론을 한 권의 책에 담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일이요, 될 수없는 일인 것이다. 결국 그 몇 가닥만 잡아 진지하게 논해 보기로 했다. 풀 한 포기, 돌 하나를 가지고 고민하는 것이 보다 실질적인 접근 방법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내가 읽은 책의 양도 문제가 되었다. 내 게으름도 탓이긴 하지만 나는 도대체 읽기 어려운 책은 읽지 않았다. 그런 독서량으로 무슨 권위 있는 책을 쓰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진에 대한 생각은 누구 못지않게 많이 했다. 가르치기 위해서도 그러지 않을 수 없었지만 '사진'은 아직도 내 뇌리 한가운데에서 떠나지 않는 물음표이다. 칠십 나이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지만 이제 사진에 대한 내 생각을 내말로 얘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은 겪어 왔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내 말에 대해나 나름으로의 책임은 질 수 있다는 자신은 가지고 있다. 남의 말을 원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로되, 직접 인용을 거의 하지 않은 것이 이 때문이다.
사십여 년에 걸친 학교생활의 절반 이상을 사진을 가르치면서 지내 왔다. 그 간의 인연으로 나와 얽혔던 많은 제자들에게 고마운 인사의 말을 전하고자 한다. 그들로 해서 내가 있었고, 그들로 해서 내가 자랄 수 있었다. 그러한 거래를 떠나서도 그들은 내 든든한 이웃이다. 사진계의 많은 선후배, 동료들이 그러하듯, 학교를 일단 떠났으니 이제 사진 속에서만 살 것이다. 이제부터는 사진 찍기에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하겠지만 문득 사진에 관한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면 짧은 글로라도 발표할 작정이다. 여생을 여생으로 소모하기보다, 여생을 여생으로 누리다가 가고 싶다.
2003년 9월 '밝은 방'에서, 한정식
나 무
나의 첫 사진집을 펴낸다. 내 사진의 원점으로서 첫 이정표를 세움과 동시에 내 사진 행위의 바탕을 다음 몇 가지 점에서 확인하는데 이 사진집의 뜻을 두고자 한다.
첫째, 진정한 리얼리즘에 대한 신앙이다.
생활주의 사진이 리얼리즘의 이름으로 이 땅에 들어온 이후로, 새로운 사진 미학을 세움에 공도 컸으나, 이 땅의 사진 층이 두껍지 못한 탓으로 마치 생활주의 사진만이 리얼리즘의 전부인양 생활주의 사진의 독무대를 이루다시피 된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으로 내게 느껴진다. 사진의 다양화를 위해서도 별로 도움되는 현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동시에 이 세계와 우주라는 무한 공간과 존재와 소멸이라는 절대 시간을 인식하고, 깊이 침잠하여 나를 또 자연에 파고 듦에 당하여는 이 생활주의 사진은 너무 외향적이며, 더구나 그 공리성으로 해서 생명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기에는 그 그릇이 되바라지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알프렛 스티글리츠’를 기점으로 ‘에드워드 웨스튼’과 ‘안셀 아담스’로 이어지는 저 위대한 그리고 진정한 리얼리즘의 거대한 산맥은 그런 의미에서 내가 두르고 살아야 할 울타리임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번의 또 앞으로의 내 작업이 그들의 모방 내지 계승을 뜻함은 물론 아니다. 다만 그들의 구도자적인 숭엄한 탐구 전신과 그 자세를 리얼리즘의 본질로 받아들여 그를 바탕으로 초가삼간이나마 내 집을 짓고자 할 따름이다.
둘째, 에로티시즘에 대한 관심이다.
이 에로티시즘이 얄팍한 성적 자극이나 흥미를 뜻함이 아님은 물론인 바, 내게 있어서 에로티시즘은 한 개 생명현상으로서 파악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죽음의 극복을 목적으로 하는 생명 연장수단이 아닌, 그 자체가 완전한 목적인, 그리고 오히려 죽음의 연장선상에서 위치하는 생명현상으로서, 자기 소멸로서 내게는 파악되어 왔던 것이다. 이 에로티시즘의 비공리성은 ‘조르쥬 바타이유’도 지적한 바 있을 뿐 아니라, ‘디 에치 로멘스’도 이 에로티시즘을 고유한 생명현상으로 본능에서 분리시켰으며, 생식욕에 결부시킴을 경멸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내게 있어서 에로티시즘은 영원한 갈증이요, 저 목숨의 깊은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뜨거운 샘물 그 자체인 것이다. 짙은 살내음이며, 아픈 피흘림이며, 화사한 우울이며, 허무요, 영원이요, 죽음 그 자체인 것이다. 이 에로티시즘이 공리성에 상대한다는 것은 예술 본래의 순수성에도 통하는 것으로, 예술 행위와 에로티시즘이 다 같이 연소요, 카타르시스요, 그 뒤에 허탈의 깊은 심연을 두고 있음은 무언가 사시사적이기도 하거니와, 아름다움이라든가 그리움, 외로움 등의 모든 순수한 감동이 모두 이 에로티시즘, 죽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내가 이 에로티시즘에 관심을 갖게 한 요인들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존재의 본질 저 밑바닥 깊숙한 곳에 바탕을 둔 생명 현상으로서의 이 에로티시즘은 앞으로도 계속 파 들어갈 커다란 나의 광맥인 것이다.
셋째, 한국적 체취에 대한 모색이다.
한국적인 것은, 적어도 한국적인 냄새가 나는 것은 민속촌이나 겨우 초가의 지붕에서만 더구나 그리 안이하게 찾아질 것은 아니지 않은가 싶다. 초가를 찍고 민속놀이를 찍어도 그 표면만 찍힐 때, 그것은 싸구려 관광포스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작가의 감각에 따라서는 서구나 일본의 냄새가 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무엇을 찍든 그 속에서 한국적인 냄새가 느껴지는 그런 사진을 만들기 위한 모색은 나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진가들이 모두 진지하게 고민해야할 커다란 과제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과제가 그렇게 간단히 쉽게 풀어지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는 다음, 다음으로 이어지는 내 작업에서 계속 모색해 나아가야 할 숙제로 생각하여 초초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여기 담아 놓은 나무나 또는 그를 파악하고 있는 내 눈, 그를 다룬 내 솜씨에서 그러한 내 노력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에게 느껴지기를 원하는 것은 한국적 체취에 대한 모색이 내 의식의 밑바탕에 자라잡고 있음을 내 스스로에게 확인시키고 싶은 뜻에서인데, 이는 동시에 사진가로서 내 존재에 대한 재확인이기도 하다.
이로서 난 내 첫 화살을 쏘았다. 두 번째 화살도 준비 중이다. 과녁을 향해 이 화살들이 얼마나 접근해 가는가가 내 사진에 나 스스로가 거는 기대인 것이다. 요행수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과녁에 화살 하나 꽂지 못하고 끝이 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 세운 이 이정표에 나는 과연 얼마나 멀리까지 벋어날 수 있을는지, 어떻게 몇 번이나 탈을 벗고 새로워지는가가 보다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결국 내 키를 재기 위한 기준으로 여기 이 사진집을 감히 내어 놓게 된 것임을 밝힌다.
1978년 12월 '밝은 방'에서, 한정식
북촌, 나의 서울
내가 서울을 찍기 시작한 것은 1978년, 일본에서의 짧은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부터였다.
내가 사진을 처음 시작한 것은 1967-8년 무렵, 홍순태 교수가 결성한 아마추어 모임 '백영회'에 가입하면서였다. 임응식 선생의 지도를 받으며 사진의 기록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도 그 '백영회'에서였다. 그러나 기록의 진정한 의미와 그 가치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했다. 그저 길거리에 떨어진 동전 줍듯 흥미로운 소재들을 눈에 띄는 대로 찍어 콘테스트에 내는 것이 사진 활동의 거의 전부였다. 그래도 인간의 삶을 찍는 것이 사진이라는 인식은 그때 형성되었지만, 진정한 기록적 가치에 눈을 뜨고, 확신이 생긴 것은 그 짧은 유학을 통해 사진에 대한 개념이 정립된 이후부터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기록성에 매달리기보다는 예술성에 기울었다. 내 기질 탓이었다. 귀국 후의 첫 개인전도기록성과는 인연이 먼 나무였다. 그 전시에 이명동 선생과 함께 오셨던 임 선생이 역시 이명동 선생과 함께 낙담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시던 눈길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예술성에 기울었다고 해서 기록성을 잊거나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포기할 수도 없었다. 공부하면 할수록 기록성이야말로 사진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임을 절감하기 때문이었다.
그 바탕에서 이루어진 것이 이 '북촌이다. 서울이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조용하던 서울이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뭉텅뭉텅 살점 떨어져 나가듯 서울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것이 보였다. 내가 돌아온 시점만 해도 이미 늦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아담하던 집들이, 눈에 익은 골목이, 벌써 많이들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시작해야 할 시점이기도 했다. 더 늦기 전에 남은 것이나마 누군가는 기록해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일면서 그렇다면 그것은 내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울 토박이이다. 그것도 소위 사대문 안에서 십여 대를 이어 살아온 토박이 중의 토박이이다. 그런 내가 더구나 사진의 기록적 가치에 대한 확신을 가진 내가 이 서울을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또 있었다. 가만 따져 보니, 서울 정도 600주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렇다, 싶었다. 그 600주년을 빈손으로 맞고 보낼 수는 없었다. 600주년을 맞이하여 전시도 하고 사진집도 발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서울을 찍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서울 정도 600주년도 지났다. 정작 그 600주년이 되던 해에 나는 발표를 포기했다. '서울 600주년 기념'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굿판이 여기저기 돌림병처럼 번지고 있었다. 거기 끼인다는 것은 남들의 스캔들에 내 몸을 맡기는 것 같아 끔찍하였다. 그뿐 아니라 사진은 시간이 갈수록 빛을 발하는 독특한 매체이다. 시간으로 해서 사진이 발효하기 때문이다. 배추가 김치가 되고 콩이 메주가 되듯, 시간의 효모 작용으로 전에는 없던 가치가 새로 생기고, 매력이 깊어지는 것, 이것이 사진이요. 사진에서의 기록성이라는 것이다. 묵힐수록 깊은 맛이 배는 터에 발표를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한정 묵힐 수도 없는 일이기도 해서 찍기 시작한 지 30년이 지났기에 발표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이런 심정으로 지금 다시 이들 사진을 들여다보니 아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벼르다가 놓친 것들도 많고, 조금 더 잘 찍을 걸 싶은 것들도 많아서이다. 무엇보다도, 서울이 급변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였다. 그 이전에도 헐리고 세워지고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말 그대로 환골탈태, 상전벽해의 일대 전환은 그때부터였던 것이다. 내가 사진에 입문한 것이 바로 그 직전이었건만, 뻔히 눈을 뜨고도 무심히 넘긴 둔감이 두고두고 아쉽기만 하다. 게다가 나는 귀국 이후 주로 예술성에 집착하여 기록성과는 거리가 먼 곳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이왕 들어선 길, 이 방면에서도 보람을 찾고자 열심히 노력도 하고 있다. 그러나 소위 예술성이라는 게, 이게 자칫하면 물거품 같은 것이라, 꺼져 버리고 말 것만 같은 일말의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예술성 쪽에서도 기록적 가치에 견줄 만한, 보다 확실한 미학을 나름대로 정립해 놓기 위해 고민도 하고, 모색도 하고 있는 중이다.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이 예술성에서도 사진의 또 하나의 가치, 의미는 분명 찾아질 수 있다는 확신, 아니 찾아내야 하겠다는 일종의 사명감으로 나를 독려하고 있다. 이것이 서울을 찍는 데 전념하지 못했던 이유요, 그래서 느끼는 아쉬움이기도 하다.
이 '북촌'은 내 개인 기록이다. 사진으로 엮은 나의 고향 이야기로, 내가 아는 서울, 내가 느끼는 서울, 내 기억 속의 서울이 여기 담겨 있을 뿐이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서울의 북촌 지역이었다. 그리하여 '서울' 하면 내게 그것은 그대로 북촌을 뜻한다. 나의 발길이 북촌에만 머문 이유요, 북촌만으로 이 사진집을 엮은 이유이기도 하다. 하기야 서울이라고 하면, 특히 옛 서울은 대개 북촌 지역이 중심이었다. 따라서 이 '북촌'은 북촌이로되 실은 그대로 나의 서울 이야기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서울에 대한 객관적 보고서를 만들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흔히들 사진은 객관적 매체라고 아는데, 이 세상에 객관적 사진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객관적이고자 하는 의식은 있을지 몰라도, 그 객관적이고자 하는 의식조차도 이미 주관의 발로인 것이다. 그래서 내 개인 이야기로 끝내는 것이 옳겠다는 마음으로 엮은 것이 이 '북촌'이다.
2010년 3월 '밝은 방'에서, 한정식
나무
나무와 만난 지도 십오 년이 더 넘었다. 우연한 인연이었지만, 만나고 나서부터 나무는 지속적인 나의관심의 대상이었다. 나무의 어떤 점 때문인가는 나도 알 수가 없다. 내 체질이 식물성일 거라는 생각은 해 보았다. 우연히 만났지만 호흡이 잘 맞는다는 느낌은 지금도 그대로다.
처음엔 나무가 보여주는 극적 형태에 끌렸었다. 사람 몸통 같기도 하고 얼굴 같기도 하고 짐승 같기도 했다. 그러나 특히 이상하게도 많은 나무들이 여체를 연상시켜 주었다. 뿌리며 줄기의 꼬임이나 가지의 갈라짐이 선정적이기도 했지만, 우람한 고목도 그 살결은 풍만한 여인처럼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나무가 여성적으로 나타난 것은 나무가 그래서만이 아니라 내게 그 소인이 있었던 것 같다. 에로티시즘에 대한 내 관심이 그렇게 표출되었으리라는 생각이다. 내가 어째서 에로티시즘에 흥미를 갖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무언가 생명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본질은 에로티시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젊음과 힘과 아름다움의 근본은 에로티시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앞세워 찍은 나무는 아니었다. 여인에 대한사랑이 논리를 근거로 하지 않듯 나무에 대한 내 애무는 본능적 충동이었다.
나무를 찍은 것은 빛 때문이기도 했다. 나무라서 찍기도 했지만, 빛이라서 찍기도 했다. 내게 있어서 빛은 사진 그 자체다. 빛이 곧 사물이고 빛이 곧 나무인 것이다. 빛 때문에 한 나무를 몇 번씩 찾기도 했고, 빛을 기다려 한 군데 죽치고 앉아 몇 시간을 버티기도 했다. 아무 소용도 없는 사진이 될 줄 뻔히 알면서 단지 빛이 좋아 찍어 놓은 것들이 내 밀착에는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빛은 물처럼 생명이기도 했다. 죽어가는 나무에 물을 부으면 살아나듯, 빛을 받으면 살아났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없던 것이 나타났다.
물 또한 빛이었다. 물을 먹고 나무는 빛을 발한다. 없었던 빛이 물로 해서 생긴다. 비가 오는 날은 그래서 내가 나무를 찾아 나서는 날이기도 했다. 물 자체도 빛이지만 물 묻은 모든 사물은 빛을 발한다. 흙먼지 날리는 골목길도 비만 오면 물에 젖은 나무처럼 생기가 돈다. 에로티시즘은 물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물을 먹은 나무는 살아 꿈틀거린다. 메말랐던 나무에 비가 내리면 껍질이 온통 물을 받고 일어나 번들거린다. 물을 부으면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펄떡펄떡 솟구치며 버둥댄다. 물 머금은 나무는 욕조 속의 여체처럼 신선하다. 물은 나무에 빛을 주고 생명을 주고 욕망을 주는 미약이었다. 물은 빛일 뿐 아니라 에로티시즘이기도 했다.
1977년 가을, 첫 사진전이 일본 동경의 니콘 살롱에서 열렸다. 그간의 나무들을 정리하여 엮은 전시였다. 열어 놓고 보니 불만스럽기만 했다. 귀국 후, 사진을 대폭 교체하고 인화도 달리 하여 78년 겨울, 서울의 공간화랑에서 새로이 선을 보였다. 그 때 전시했던 나무를 정리한 것이 이 사진집이다. 십여 년 전의 사진을 이제 새삼스럽게 책으로 엮어내는 것은 이들 사진이 내 사진의 출발점이요, 동시에 원점임을 재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지금의 내 주된 작업도 거의 모두 이 나무에 뿌리한 것들이지만, 앞으로도 내 관심이나 사진적 접근 방법에 큰 변화는 있을 것 같지 않다. 잊혀져가던 사진의 먼지를 털어 책으로 엮는 까닭을 여기에 두고자 한다.
1989년 12월 '밝은 방'에서, 한정식
풍경론
누군가 내 사진을 친화의 사진이라고 한 적이 있었다. 또 누군가는 목관악기의 음색에 내 사진을 견주기도 했다. 모두 내 사진에 친근감을 가지고보아준 사람들이라 그렇게 보였겠지만, 듣고 보니 그런 듯도 했다. 하긴, 나는 사물을 분석하고 비판하고 주장하는 쪽이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음미하는 편이다. 있는 그대로의 그들을 사랑하고 받아들인다. 나는 내 눈에 띄는 사물이 무엇을 뜻하며, 그 사물이 나의 삶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가를 생각하고 분석하지 않는다. 않는다기보다 되지를 않는다. 다만, 그들 사물이 내 안에서 어떻게 공명하는가에 귀를 귀울인다.
우리나라 말에 '관조' 라는 말이 있다. 내 사진에 담긴 내 정조가 있다고 한다면 이 '관조' 에서 그리 먼 것이 아니지 않을까 싶다. 또한, '직관' 이란 말도 있다. 우리의 의식에 깊이 뿌리박힌 인식의 한 형태로, 나 역시 내가대상을 만나는 순간의 그 감성적 진실을 중시한다. 작품에 관한 한, 나는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서구적 체질에서 먼 느낌이다. 나무를 찍든, 발을 찍든, 풍경을 찍든. 나는 내 정감으로 그들을 감싼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진이 찍히지 않는다. 내 체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지만, 내 체질만이 아니라, 우리 한국인을 비롯한 동양인의 보편적인 정서가 아닐까싶기도 하다. 왜 나무를 찍었는가. 왜 그토록 오랜 동안 발을 찍었는가? 물으면 얼른 그 대답을 찾기가 어렵다. 솔직히 말해서, 그냥 찍은 것뿐이다. 나무가 좋아서 찍었고, 우연히 발이 눈에 들어와 찍기 시작한 것뿐이다. 나무건 발이건 그 소재의 어떤 특성을 깊이 생각하고 그것이 내게 준 의미를 찾아 찍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 소재가 내 안에서 나와 만나 빚어내는 화음을 찾아 그를 읊어 낸 것이다.
만남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만남은 우연히 이루어지지만, 만나고 나서부터 진지한 동행은 시작된다. 특히, 마음을 끄는 소재는 한 번 스쳐 지나가 버리지를 않는다. 마음에 머물러 언제고 다시 찍고 싶어진다. 서로의 이해를 통해 만남이 깊어지듯, 정이 통하는 소재와는 그래서 긴 동반 여행이 시작된다. 나무를 아직도 관심 깊게 관찰하고 있고, 발을 십여 년간 찍었고, 이십 년이 다 되도록 아직도 서울을 찍고 있고, 지금의 이 풍경도 벌써 십여 년을 찍어 왔다. 이것이 다름 아닌 이런 만남이라는 것일 게다. 그리고 그게 내 사진인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풍경을 많이 찍는다. 자연 그대로의 풍경도 찍기는 하지만, 대체로 자연과 인간이 어울려 만들어낸 문화적 풍경에 주로 눈길이 간다. 하기야 자연이 자연 저 혼자 존재할 수 없고, 문화가 독자적으로 형성되는 것도 아니고 보면 풍경에 인간의 흔적이 묻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풍경이라는 것이 산과 구름 말고도 온갖 사물이 어우러져 이루어내는 교향악 같은 것이라는 생각은 줄곧 해 왔었지만, 그 여러 가지 속에 거기 사는 사람들의 심성도 진하게 섞여 있다는 것은 이번의 작업을 통해 얻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우리 들녘의 풍경은 그런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다. 추수 뒤, 논바닥에 엮어 놓은 짚단은 그대로 우리들 민초의 모습이었다. 허리 아프게 살아온 우리들 서민의 모습이었다. 하필 짚단만이 아니었다. 요즈음 농사에 흔히 쓰이는 비닐 조각들도 그렇고, 바위나 나무나 풀들이 모두 그랬다. 질박하고 평화롭게 살아온 우리 조상들과 그들의 심성을 닮아 있었다. 내가 찍고자한 것은 이것이었다. 주변 사물과 우리들 민초의 형태적 유사성을 넘어선 곳에 깃든 그 심성이었다. 온갖 사물이 주변 경관과 어울려 이루어낸 풍경에서 나는 '풍토'라는 낱말의 뜻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자연에 밴 사람들의 내음. 사람들 심성에 깃든 자연의 향취를 이 낱말은 풍기고 있었다. 이것은 하필 우리나라 풍경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일본은 일본대로 미국은 미국대로 서로 저들을 닮은 풍경과 풍경을 닮은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나라마다 그 풍경이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다른 까닭이 거기 있지 않을까 싶다.
이들 풍경 말고도 우리의 땅을 찍은 「지도」를 위시해 내 고향으로서의 「서울」 등등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하고 있는 사진들이 조금 더 있다. 내 관심은 이렇게 다양하지만, 그렇다고 그들 대상을 대상 그대로의 다양한 가치로 존중하고자 하는 것이 내 뜻은 아니다. 대상이 무엇이건. 나는 내 식으로 깎고 다듬어 내었다. 처음 나무」를 펼쳐 놓고, 나도 모르게 이건 내 목각이야. 중얼거렸던 기억이 난다. 특히 인화 과정에서, 가려 굽고, 더 태우고 하면서 나는 나무를 깎고 다듬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히곤 했었다. 「발」도 그랬지만. 이번의 풍경도 나는 역시 참으로 정성껏 다듬었다. 「풍경론」이라 이름 붙인 까닭은 그래서이기도 하다.
내 사진의 출발점이 여기 있었다. 나는 대상을 한 번도 대상 자체의 객관적 실체로 파악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나무는 나무가 아니었고, 발은 발이 아니었고, 풍경은 풍경이 아니었다. 하기야, 리얼리티라는 것 자체가 대상의 실체성을 전제로 하는 말이 아니었고, 애초에 실체라는 것 또한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다. 세상 만물에 자성이 없다는 부처님 말씀은 이런 뜻까지를 포함한 것이겠지만, 사실상, 모든 사물은 각 개체의 인식에 의해 그 정의가 내려지고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 절대적 가치나 의미가 미리부터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을 내 체온으로 품어 부화시켜내는 것. 그것이 지금까지의 내 사진이라는 생각이다.
관조라는 말이 애초에 주관성이 배제된 마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런 내 사진은 관조와 별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스스로'관조' 를 입에 올린 것은 내가 어떤 의도로, 또는 어떤 의지를 가지고 대상을 일부러 왜곡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자연이 눈 앞에 저절로 펼쳐져 있듯. 내 사진 또한 정성껏 다듬다 보니 형성된 자연스러운 내 모습이지, 모양내려고 거울 앞에 앉아 화장을 한 얼굴이 결코 아닌 것이다.
앞으로도 내 사진에 커다란 변화는 아마 없을 것이다. 변화가 아니라, 올바른 정리나 하고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별로 한 것도 없이 이만큼을 살아 온 것이다. 바라기는 나이와 함께 내 사진에도 무게와 깊이가 더해졌으면 하는 것뿐이다.
1997년 6월 '밝은 방'에서, 한정식
「고요」를 처음 발표한 것이 2002년이었다. 「고요」를 발표하면서 나는 이제부터 내 사진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전에 발표한 사진들은 말하자면 습작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당시에는 습작으로 발표하지 않았다.「고요」 작업에 들어가면서 이전의 내 작업들이 결국은 「고요」를 위한 습작이었음을 깨달았을 뿐이다.
‘내 사진의 시작’이라는 것은 그것이 출발점이었다는 뜻이다. 나 나름의 완성을 향한 첫 발을 내딛은 것이다. 따라서 첫 「고요」도 완성을 향한 하나의 습작에 지나지 않는다. 두 번째 「고요」가 아직 완성형이 아님 역시 사실이니까, 이 또한 또 하나의 습작을 내어 놓는 것이 되겠다. 그 습작에 불과한 사진들을 발표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시간이 지나서는 ‘최후의 한 작품’으로 귀결되리라 생각된다. 그 최후의 한 작품이 그 이전의 모든 작품들은 모두 습작에 불과한 것이 될 테니까. 그러한 최후의 한 작품을 놓아두고, 완성형에 미치지 못한 습작을 발표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하기야 ‘완성’이라는 것은 최후의 판단이요, 적어도 마지막 작품에 대한 논의일 것이다. 그 이전의 것들은 아무리 완성형이라 발표했어도 다음 작품이 더 진전된 것일 때 그 전의 것은 결국 습작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 아무리 내가 완성작이라 생각해도 밀도가 모자라면 미완성이요, 습작이라고 겸손을 떨어도 남들에 의해 인정이 되면 완성형이 될 수 있겠지만 이들은 모두 작가로서의 삶을 마감하는 자리가 아니고서는 평가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 능력이 그뿐이라면 그 자리가 바로 자기의 완성일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첫 작품이 대표작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흔하다. 그게 첫 작품인지는 몰라도 로버트 프랭크는 「미국인」이 데뷔작이자 대표작이다. 윌리엄 클라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까르띠에-브레송은 데뷔작이고 대표작이고가 없이 모조리 한 작품이다. 나 또한 이 두 번째의 「고요」가 ‘완성’에 이르지 못한 채 내 작품의 최고치로 평가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완성’에는 이르지도 못하고 사라진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그것이 내 능력의 한계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이 「고요」가 두 번째라는 것은 뒤에 또 발표할 예정이라는 뜻이다. 내 예정은 삼부작이다. 세 번째 「고요」를 통해 나 나름으로의 완성형을 내어놓겠다는 예정이다.
세 번째 「고요」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안에 「고요」라는 이름으로는 작품을 발표할 생각은 없다. 나 나름으로 ‘이제 되었다’ 싶은 마음이 들지 않으면 「고요」라는 제목은 더 이상 달지 않을 생각이다. 어쩌면 세 번째 「고요」는 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게 내 능력이라면 슬픈 일이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완성’은 어디에 목표를 두고 하는 말인가?
한 마디로 ‘사진 찍기’이다.
2008년 10월 '밝은 방'에서, 한정식
사물을 벗어날 때 사진은 홀로 설 수 있다. 사물 아닌 사진을 찍는 일. 그 때 사진은 찍힌다.
현재의 순수 사진의 문제점은 그것이 사진만의 성과를 거두게 해 주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그 성과는 음악이 거둘 수 있고 미술이 할 수 있고 문학이 이룰 수 있는 성과와 다르지 않다. 사진이 그 재현성에 정체성을 두고 작업할 때 사진 독자적 가치가 창출된다. 그것은 다른 어떤 예술로도 거둘 수 없는 성과다.
그러나 바이올린이 거두는 성과를 피아노로도 얻을 수 있다고 해서 바이올린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처럼 음악적 성과나 미술의 성과가 문학이 이루는 성과와 별로 다르지 않다고 해서 문학만이 예술로서의 지위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결과적 성과가 같을지는 몰라도 이르는 과정이 서로 다름으로 해서 그 의미와 가치는 따로 가지게 되는 것이다. 순수 사진은 그래서 존재 이유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애초에 모든 예술의 목표는 같은 곳에 있었다. 가는 길이 달랐을 뿐. 그렇다고는 해도 그래도 사진만의 고유성을 찾는 길은 없을까 하는 것이 나의 고민이었다. 사진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예술에 도달할 수 있는 길 찾기. 음악이 거두는 성과나 문학이 이루어내는 것과 같은 결과를 이룰 뿐이라면 굳이 사진을 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었던 것이다. 사진을 해야만 하는 이유, 사진을 고집해야 할 이유가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다 찾아낸 것이 존재론적 사진이었다. 존재론에 관한 한 사진을 따를 매체는 따로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유사 예술에 영화가 있지만 영화는 움직이는 사진(활동사진)일 뿐 아니라 영화는 동영상이기 때문에 기록에 적합하고, 존재론에 관한 한 정지 영상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존재론에 관한 한 사진이 가장 알맞다고 하는 것은 사진의 고유한 능력인 재현성에 바탕을 두면서 재현성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존재론적 사진의 바탕은 재현성에 있다. 그 재현성이 다른 매체로서는 이룰 수 없는 성과를 이루게 한다. 그러면서도 존재 자체의 재현 기능에 머물지 않는 것은 존재를 제시하는 데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존재를 넘어 영원이라든가 진리라든가 또는 그리움이라든가 하는 초월적 가치 창출을 향한다. 종착지가 없다는 것, 가서 머물러야 할 곳을 두지 않는다는 것, 거기에 존재론적 사진의 의미가 있다. 시가 언어의 고유 가치인 의미 전달 기능을 바탕으로 하되 의미에 머물지 않음과 경우가 같다. 내가 쓴『사진과 현실(2003년, 눈빛)』속의 ‘순수 사진론’은 사실상 순수 사진을 지향하는 사람들에 대한 지침 이전에 이러한 내 사진적 입장에 대한 백서였다. 순수 사진에 대한 내 입장, 존재론으로 기운 이유이다. 물론 이것만이 전부일 수는 없다.
예술은 그 분야의 선택에서부터 예술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으로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고, 의미가 있고 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한 확실한 이유를 가지고 출발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존경받아야 할 특이한 사람이고 대개의 예술가들이 예술에 종사하는 이유는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일 뿐 이유가 있고 의미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붙은 이유는 대개 나중에 만들어진 것, 이 글처럼 하나의 변명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내 사진은 사물의 존재로 향하고 있다.
내 사진은 사물의 존재로 향하고 있다. 특히 물, 돌, 풀 등 자연 자체에 대한 관심이요. 애정이라 해도 좋다. 이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내가 왜 자연으로 눈을 돌린 것일까. 사람 얘기, 사람 사는 사회에 대한 관심이 사진의 주요 관심사항이요. 사진의 정체성을 거기에서 찾는 것이 보편적 사진 인식임은 잘 알지만, 그리고 나 자신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다 내 눈을 끄는 것은 대개의 경우 인간을 떠난 자연이다. 현실도피가 아닐까 생각해 본 적도 있다. 그리고 그런 면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언제나 내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것은 자연이다. 그처럼 자연을 마주하면 언제나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난 듯 가슴이 트인다. 자연이 어떤 구체적 메시지로 다가오는 것은 아닐지언정 그런 구체적 메시지보다 더 절실한 메시지를 그 자연에서 느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내가 지향하는 자연의 사진이란 이런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 풍광의 재현이 아니라, 그 속 깊이 잠겨 있을 시원에 대한 향수, 하늘이 열리던 때의 그 아득함을 생각한다.
내가 진작부터 모색해 오던 어떤 경지, '적정 적멸(寂靜寂)' 곧 '공(空)의 경지라는 것도 결국은 사물의 근원적 존재 양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움직임이 사라진 고요. 움직임도 움직임 아님도 아닌 고요. 다시 말해서 생성, 소멸을 벗어나 형태도 사라지고 존재감마저 느껴지지 않는 그런 경지. 소설가 김훈의 글에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구르는 자전거 바퀴의 중심에는 움직임이 없다 한다. 중심이 움직이면 바퀴는 구를 수가 없다 한다. 대신 밖의 테두리가 요란하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태풍의 눈이 그러하듯 모든 움직임의 중심은 결국 고요하다는 뜻이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종말인 거기에 '공'은 열려 있다. 그 곳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내 <고요>의 또 하나의 목표, 아니 보다 커다란 바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욕심일지도 모른다. 왜냐 하면 너무나 아득한 목표일 뿐 아니라, 사진, 아니 인간의 어떤 언어로도 이룰 수 없는 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에서 잠시 썼듯 비언어적 매체를 통한 관념의 영상화는 일종의 모험이다. 오히려 내 의도를 벗어나 전혀 다른 의미로 확산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그리하여 그 언저리까지만 가도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 고요II 작업을 하였다.
2013. 5
한정식
내가 절을 찾는 이유
절 안에 부처님이 계신 것도 아니요, 절 밖에 부처님이 계신 것 또한 아니건만 굳이 절을 찾는 이 마음이 바로 중생심인 줄 알면서도 절을 찾는다. 마음이 편해서이다. 마치 집에 돌아와 발 뻗고 안방에 들어앉은 느낌을 준다. 모든 사물이 부처님의 얼굴이요, 들리는 모든 소리가 부처님 말씀이거늘 굳이 자연을 찾아 물가에 서성이는 것은 그 역시 마음의 평안 때문이다.
부처님이 절에만 계신 것은 아니지만, 절에 가야 부처님이 가까이 느껴지고, 부처님 말씀 역시 절에서라야 조금 더 깊이 스미는 것이 나 같은 하근기 중생들의 신심이다. 세상이 무대요, 삶이 연극이라고는 해도 극장에서라야 연극의 맛을 느끼게 되는 얕은 심성 탓일 것이다. 부처님이 하필 절에 계신 것도 아니고, 절에 가야 부처님을 뵐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삼라만상 하나하나 부처님 아닌 것이 없고, 법문 아닌 소리가 어디 있으랴. 는 말은 늘 듣는다. 하늘에 뜬 흰 구름, 바위틈으로 숨어 흐르는 여울, 숲을 누비는 서늘한 바람… 얼굴을 돌리면 바로 부처님 얼굴이요, 귀를 기울이면 부처님 말씀이요, 들여 마시면 부처님 숨결인 것을. 그럼에도 절을 찾은 것은 거기가 부처님의 마당이어서이다.
이 세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참으로 신비하다. 겉모습 속에 또 보이는 속이 들어 있고, 보이지 않는데 보이는 것이 있다. 보인다고 보이는 것이 아니요, 안 보인다고 안 보이는 것이 또 아니다. 사진은 겉모습 속에 또 보이는 속이 들어 있고, 보이지 않는데 보이는 것이 있으며, 보인다고 그것을 보이려는 것이 아니요, 안 보인다고 없는 것이 또한 아니다.
모든 불경은 그 첫머리를 “내가 이와 같이 들었사오니”로 시작한다. 이번 사진의 제목을 거기에서 따왔지만, 그렇다고 이들 사진 몇 장으로 감히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능력 밖의 일이기도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도 아닌 것이다. 나는 그저 사진만, 사진 하나만 능력껏 하다 갈 생각이지 부처님의 말씀 운운은 언감생심 꿈도 꾸어 보지 못했다. 사진으로 무엇을 이루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이 역시 능력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무엇을 이루기 위해 사진을 한 것도 아니요, 깊은 뜻을 가지고 절을 찾은 것도 아니다. 사진이 좋아서 사진에 몸을 담은 것이요, 절이 좋아서 절을 찾은 것이지 무슨 목적이나 꿈을 가지고 들어서지 않았다. 우연찮게도 내가 추구하는 사진이 형상 너머의 어떤 것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부처님이 이를 일깨워 주셨고, 부처님을 가까이 느끼려던 내 의지가 절을 찾게 한 것이다.
보인다고 해서 있는 것이 아니요, 안 보인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며, 없어서 안 보이는 것이 아니요, 있어서 보이는 것 또한 아니다.
존재는 인과 연이 만나 이루어진 일시적 환영, 헛개비,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꿈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그리고 이슬 같고, 번개 같은 것.
2009년 4월 '밝은 방'에서, 한정식
이와 같이 들었사오니
이들 영상은 결국 내 마음이 이미지들이다. 내 눈 깊숙한 저 끝에 매달린 내 마음이 찾아낸 영상들이다. 부처님 말씀을 들은 대로 옮기고 싶었는데 부처님 말씀은 아직 제대로 들리지 않고 그저 내 소란한 마음이 잡아낸 영상들을 여기 펼쳐놓았다. 결국 이건 부처님 말씀도 아니건만 “나는 이와 같이 들었노라” 하고 떠들고 있는 셈이다.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지만, 결국 부처님 말씀을 새겨들은 내 마음의 깊이가 이 정도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으니 부끄러워도 일단은 펼쳐 보이기로 했다. 언젠가 내가 성숙해지면 지금보다 한 층 높은 높이에서 아니면 한 길 더 깊은 속에서 들려오는 부처님 말씀을 다시 새겨놓고 싶은 마음도 있다.
진리란 무엇인가? 이것은 누구든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의문이다. 그러나 이 의문에 관한 해답은 없다. 가장 중요한 질문, 가장 궁극적인 질문에는 해답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궁극적인 문제라고 하는 것이다. 진리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 그것은 한 마디로 규정지을 수 없다. 진리를 언어의 세계로 끌어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리는 분명 존재한다. 그대는 진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리는 '존재하는 것(that which is)'을 의미한다. 이것이 진리(truth)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이다. (중략)일단 해석이 개입되면 그것은 진리(truth)가 아니라 실체(reality)가 된다. 그대가 아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실체이다. 이것이 진리와 실체의 차이점이다. 실체는 해석된 진리이다. 그러므로 ‘진리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답하는 순간 그것은 실체가 된다.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거기 해석이 가해졌다. 마음이 진리를 채색했다. 실체는 마음의 수만큼이나 많이 존재한다. 수많은 실체가 있다. 그러나 진리는 하나이다. 왜냐 하면 진리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만 알려지기 때문이다.
그대를 우물가나 강으로 데려가는 것은 목마름 자체다. 목마름 자체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지 목마른 자는 없다. 그대의 삶에서 명상와 대명사를 버려라. 동사가 살아있게 하라. 붓다는 말한다. 춤추는 자는 없고, 춤만 있을 때 거기 진리가 있다고 말한다. 미소 짓는 자는 없고 오직 미소만 있다. 강(river)은 없고 흐름(rivering)만 있다. 나무(tree)는 없고, 자라남(treeing)만 있다. 미소 짓는 자는 없고, 오직 미소만 있다. 사랑하는 자는 없고, 사랑만 있다. 삶은 하나의 과정이며 흐름이다.
2007년 5월 '밝은 방'에서, 한정식
고 요 I
사진은 사람의 생활을 대상으로 할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사진이 시간 예술인 탓이다. 시간은 생활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생활이 증발한 곳에서는 시간도 발을 멈춘다. 시간이란 변화의 단위이거니와, 인간에게 의미 있는 변화란 우리 삶의 변화, 곧 생활인 것이다. 사진이 시간 예술이라는 말은 이렇게 생활 기록의 수단으로 쓰일 때에 사진의 가치가 극대화된다는 데에서 온다.
사진은 시간의 예술이지만, 빛의 예술이기도 하다. 빛은 우선, 대상의 재현을 위한 기본 수단이다. 그러나 이에 그친다면 빛의 예술이라는 말의 내용이 너무 빈약해진다. 빛은 사진의 수단일 뿐 아니라, 대상 그 자체이기도 하다. 빛으로 사진을 찍지만, 사진으로 빛을 찍기도 한다. 어쩌면, 빛이 스스로를 찬양하기 위해 사진술을 발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생활이 배제된 사진, 이벤트가 없는 존재론적 사진에서 빛은 더욱 빛난다.
사진「고요」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나의 관심이다. 존재는 고요하다. 고요해서 고요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상태가 근원적으로 고요한 것이다. 「고요」라는 제목은 여기 유래한다. 존재는 홀로 존재한다. 홀로 있음으로써 외양이 외로워 보일는지는 모르나, 그 외로움이라는 것이 그렇다고 인간적 고독감과 관계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홀로 있음의 실존적 양태가 외로울 뿐이다. 이 홀로 있는 존재란 그래서 고요할 수밖에 없다. 이들 사진에서 나는 물과 그 속의 풀이나 돌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존재가 물에 근원한다는 뜻에서 물로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나의 발길이 가는 대로 따르다 보니 물가였고, 그 물가에 앉아 보니 그 속의 돌이 보이고 풀이 보여 그들을 그대로 잡아 본 것이다. 작품이 그 사람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일 게다. 물가를 찾은 것이나 그 속의 풀과 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모두 결국은 내 심성이 그려낸 나의 모습일 테니까.
「고요」라는 제목은 대상의 근원의 경지를 말한 것이지만, 실은 내 이름이기도 하다. 내 이름은 '정식'이지만, '식'은 돌림자, 곧 형제간의 공통된 이름이고, '한'이라는 성은 가족의 이름이니, 순수한 내 이름은 '정'뿐인데. 이 '정'이 한자로 '고요 정(靜)'자인 것이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더니, 결국 이름이 씨가 되어 나도 모르게 내가 끌려 든 것이 아닌가 모르겠다. 더구나 돌림자인 '식(湜)'자도 물이 맑다는 뜻이니, 이름 근처에서 맴을 돌다 만 것만 같다. 아니, 어쩌면 이제 비로소 내 사진이 제 자리를 찾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름이 나라면, 이름 근처에서 맴을 돌고 있는 사진이 내 사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팔자 도망은 못한다더니 이름도 팔자인지, 결국은 이름에 묶여 이름 근처에 주저앉고만 느낌이다.
2002년 5월
글 / 한정식
고요 III
사진이라는 것이 그 특성상 시간성에서 벗어나서는 홀로 서기 어려운 허약 체질임을 늘 실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성에서 벗어나고자 나는 애를 쓴다. 남다르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시간성 밖의 그 드넓은 공간을 마음껏 누려 보고 싶다는 마음에서이다
허버트 리드는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고 했다. 음악의 추상성에 대한 찬사이겠지만, 모든 예술은 근본에서 자유를 추구한다는 뜻일 것이다. 사진 역시 순수예술을 지향하는 한 자유로움은 생리가 될 수밖에 없다. 오히려 구체적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진의 한계성으로 해서 그런 '자유'는 더 강한 유혹일 수도 있다. 물론 유혹에 몸을 맡기는 것은 자칫 한량의 놀이로 전락하기 쉬운 함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진의 영역을 넓히고자 하는 시도로 이어질 때 이는 가능성을 향한 새로운 작업으로 기능하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사진은 그 근본에서 시간 예술임과 동시에 빛의 예술이다.
사진이 '빛의 예술'이라는 말은 빛이 사진을 찍는 단순 도구를 넘어, 빛 자체의 자율성을 인식하고 '빛'을 하나의 독립된 소재로 존중하는 태도를 이르는 말이다. 오로지 빛에 의해서라야 시각적 의미가 표현, 전달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여타의 매체로는 구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가능성이 이 빛에 있는 것으로 그것이 사진이요, 특히 흑백사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 빛의 자율성은 곧 영상의 자율성으로 이어지거니와 '영상의 자율성'은 순수사진의 또 하나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영상의 자율성은 '시각적 의미'를 통해 완성도를 보다 높일 수 있다. 의미라면 '문학적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지만, 그러나 들리고, 보이고, 느껴져도 언어의 좁은 폭으로는 도저히 바꿔낼 수 없는 청각적, 시각적 체험이나 육감을 대개는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처럼 말이나 글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의미가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다. 이해하기 쉬운 것으로 무한한 자연의 스펙트럼 같은 것도 있지만, 그러한 단순 경험 말고도 빛과 사물이 만들어내는 전혀 새로운 '시각적 의미가 있다. 언어만이 아니라 어떠한 매체로도 표현 불가능한 시각적 체험을 말하는 것으로, 아직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빛의 세계, 카메라와 사물이 빚어내는 시각적 '비기시체험(non-dejavue)'이라 할 일종의 육감적 체험을 뜻한다. 소위 '현대사진'으로의 길을 여기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 내 목표의 하나로, '시각적 의미'에 매달리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글 / 한정식
한정식은 90년에 나무」 작품집을 내었다. 한정식이 렌즈에 포착한 나무들의 표정을 보고 나는 사진작가의 눈에 대해 내가 배워야 할 것들을 내 눈에 줏어 담는다. 한정식이 대상을 보는 눈은 초월의 세계요, 조형의 무한 넓이이다. 한정식의 나무는 범인들이 만나는 흔한 나무가 아니다. 식물인 나무가 인간의 모습으로 내겐 다가온다.
내가 조지 발란쉰의 안무를 좋아하는 건 발란쉰이 여체 탐미주의자이기도 한 때문인데 한정식의 나무 여체를 나는 수없이 만난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요, 우리 정신을 관통하는 물줄기이다. 나무가 여체로, 토르소로 얼굴로 변하는 시각적 경험은 무지몽매한 내 눈을 개안한다. 여체뿐이랴. 한정식의 나무는 코끼리 등가죽 같은 맨살 위의 나이테가, 원형질 같은 질감이, 또는 질 같기도 하고, 근육 같은, 시멘트가 마르기 전 마치엘과 유사한 힘찬 곡선들이 그의 무궁동 렌즈에서 '숨 쉰다!' 배워야 할 것들을 (세상 살기는 죽을 때까지 배우고, 스스로 익히고, 그리고 그 체험에 만끽한다) 내 눈에 주워 담는 체험은 그래서 남부끄럽지 않다. 나무 연작 이후 한정식은 10여 년 발을 찍었다. 한 대상에 대한 집념은 그가 세상의 안팎을 오로지 렌즈 외에 등한했다는 고독한 걸음이기도 하다. 국민학교 동창생인 그의 썰렁한 키, 검정 뿔테 안경, 동시 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말 속에서도 그의 집념 무장은 내게 완강하고 고집스러워 보인다.
한정식의 「발」 연작에서도 가령 무릎 부위는 그가 빛의 탐험가였듯이 수줍고 신비한 여체 능선과 다시 조우하게 된다. 그가 만나는 피사체는 가령 사금파리나 과일 쇳덩어리라도 인간이나 자연의 흔적들을 걸러내는 묘미에 맞닿는다. 그렇게 생각이 드는 것은 휴먼 드라마가 그의 작품 속의 주제라는 점이다. 무릎과 무릎 사이로 빠져나온 발가락의 에로티시즘 같은 것도 나무 연작의 어떤 경지와의 연속선임이 분명하다. 그의 에로티시즘은 강조하는 대신 숨은 속잎의 찰나적인 영감 같은 것이다. 흔히 강조된, 혹은 노출된 에로티시즘은 때로 천박한 법이다. 그러나 숨어서 그 숨김을 음미할 때 다시 눈이 닿는 성적 도발은 그런 면에서 신선하다.
그의 「발」 연작은 신체의 발이기 전에 육체 체형 그대로 남은 것도 보인다. "몇 가닥 털이 육체의 모선 가파른 끝 부위에 마치 자연의 식물처럼 남아 있다. 사막에 핀 몇 가닥 풀처럼 한정식은 발 속에 그러므로 자연을 끌어들이고 있다. 모래 속에 묻힌 무슨 조갑지 같은 사물도 그러니까 자연의 일부다. 선명하게 드러난 발의 족문은 사선 위로 솟아난 뜻밖의 돌출, 아니, 함성으로 인해 젖은 족문이 흔건한 땀 풍긴다.
나무의 인체, 발의 자연은 한정식의 우주관의 원근법 위에서 자유자재로 숨을 불어 넣는다. 대상을 요리할 때 그의 작업은 이미 남들이 보여준 것을 초월해서 독자적 가치를 부여한다. 그것은 그가 걸어온 운명처럼 미감의 새로운 확대요 또 다른 경이의 눈뜸인데 한 주제 천착의 느린 행보가 작가적 역량의 결실임을 나는 믿는다.
시인 김영태
나의 첫 사진집을 펴낸다.
내 사진의 원점으로서 첫 이정표를 세움과 동시에 내 사진 행위의 바탕을 다음 몇 가지 점에서 확인하는데 이 사진집의 뜻을 두고자 한다.
첫째, 진정한 리얼리즘에 대한 신앙이다.
생활주의 사진이 리얼리즘의 이름으로 이 땅에 들어온 이후로, 새로운 사진 미학을 세움에 공도 컸으나, 이 땅의 사진 층이 두껍지 못한 탓으로 마치 생활주의 사진만이 리얼리즘의 전부인양 생활주의 사진의 독무대를 이루다시피 된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으로 내게 느껴진다. 사진의 다양화를 위해서도 별로 도움되는 현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동시에 이 세계와 우주라는 무한 공간과 존재와 소멸이라는 절대 시간을 인식하고, 깊이 침잠하여 나를 또 자연에 파고 듦에 당하여는 이 생활주의 사진은 너무 외향적이며, 더구나 그 공리성으로 해서 생명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기에는 그 그릇이 되바라지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알프렛 스티글리츠’를 기점으로 ‘에드워드 웨스튼’과 ‘안셀 아담스’로 이어지는 저 위대한 그리고 진정한 리얼리즘의 거대한 산맥은 그런 의미에서 내가 두르고 살아야 할 울타리임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번의 또 앞으로의 내 작업이 그들의 모방 내지 계승을 뜻함은 물론 아니다. 다만 그들의 구도자적인 숭엄한 탐구 전신과 그 자세를 리얼리즘의 본질로 받아들여 그를 바탕으로 초가삼간이나마 내 집을 짓고자 할 따름이다.
둘째, 에로티시즘에 대한 관심이다.
이 에로티시즘이 얄팍한 성적 자극이나 흥미를 뜻함이 아님은 물론인 바, 내게 있어서 에로티시즘은 한 개 생명현상으로서 파악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죽음의 극복을 목적으로 하는 생명 연장수단이 아닌, 그 자체가 완전한 목적인, 그리고 오히려 죽음의 연장선상에서 위치하는 생명현상으로서, 자기 소멸로서 내게는 파악되어 왔던 것이다. 이 에로티시즘의 비공리성은 ‘조르쥬 바타이유’도 지적한 바 있을 뿐 아니라, ‘디 에치 로멘스’도 이 에로티시즘을 고유한 생명현상으로 본능에서 분리시켰으며, 생식욕에 결부시킴을 경멸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내게 있어서 에로티시즘은 영원한 갈증이요, 저 목숨의 깊은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뜨거운 샘물 그 자체인 것이다. 짙은 살내음이며, 아픈 피흘림이며, 화사한 우울이며, 허무요, 영원이요, 죽음 그 자체인 것이다.
이 에로티시즘이 공리성에 상대한다는 것은 예술 본래의 순수성에도 통하는 것으로, 예술 행위와 에로티시즘이 다 같이 연소요, 카타르시스요, 그 뒤에 허탈의 깊은 심연을 두고 있음은 무언가 사시사적이기도 하거니와, 아름다움이라든가 그리움, 외로움 등의 모든 순수한 감동이 모두 이 에로티시즘, 죽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내가 이 에로티시즘에 관심을 갖게 한 요인들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존재의 본질 저 밑바닥 깊숙한 곳에 바탕을 둔 생명 현상으로서의 이 에로티시즘은 앞으로도 계속 파 들어갈 커다란 나의 광맥인 것이다.
셋째, 한국적 체취에 대한 모색이다.
한국적인 것은, 적어도 한국적인 냄새가 나는 것은 민속촌이나 겨우 초가의 지붕에서만 더구나 그리 안이하게 찾아질 것은 아니지 않은가 싶다. 초가를 찍고 민속놀이를 찍어도 그 표면만 찍힐 때, 그것은 싸구려 관광포스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작가의 감각에 따라서는 서구나 일본의 냄새가 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무엇을 찍든 그 속에서 한국적인 냄새가 느껴지는 그런 사진을 만들기 위한 모색은 나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진가들이 모두 진지하게 고민해야할 커다란 과제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과제가 그렇게 간단히 쉽게 풀어지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는 다음, 다음으로 이어지는 내 작업에서 계속 모색해 나아가야 할 숙제로 생각하여 초초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여기 담아 놓은 나무나 또는 그를 파악하고 있는 내 눈, 그를 다룬 내 솜씨에서 그러한 내 노력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에게 느껴지기를 원하는 것은 한국적 체취에 대한 모색이 내 의식의 밑바탕에 자라잡고 있음을 내 스스로에게 확인시키고 싶은 뜻에서인데, 이는 동시에 사진가로서 내 존재에 대한 재확인이기도 하다.
이로서 난 내 첫 화살을 쏘았다. 두 번째 화살도 준비 중이다. 과녁을 향해 이 화살들이 얼마나 접근해 가는가가 내 사진에 나 스스로가 거는 기대인 것이다. 요행수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과녁에 화살 하나 꽂지 못하고 끝이 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 세운 이 이정표에 나는 과연 얼마나 멀리까지 벋어날 수 있을는지, 어떻게 몇 번이나 탈을 벗고 새로워지는가가 보다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결국 내 키를 재기 위한 기준으로 여기 이 사진집을 감히 내어 놓게 된 것임을 밝힌다.
1978년 12월, 한정식
「고요」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나의 관심이다. 존재는 고요하다. 고요해서 고요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상태가 근원적으로 고요한 것이다. 「고요」라는 제목은 여기 유래한다. 존재는 홀로 존재한다. 홀로 있음으로써 외양이 외로워 보일는지는 모르나, 그 외로움이라는 것이 그렇다고 인간적 고독감과 관계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홀로 있음의 실존적 양태가 외로울 뿐이다. 이 홀로 있는 존재란 그래서 고요할 수밖에 없다. 이들 사진에서 나는 물과 그 속의 풀이나 돌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존재가 물에 근원한다는 뜻에서 물로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나의 발길이 가는 대로 따르다 보니 물가였고, 그 물가에 앉아 보니 그 속의 돌이 보이고 풀이 보여 그들을 그대로 잡아 본 것이다. 작품이 그 사람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일 게다. 물가를 찾은 것이나 그 속의 풀과 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모두 결국은 내 심성이 그려낸 나의 모습일 테니까.
2002년 5월 ‘밝은 방’에서, 한정식
“지금 내게는 봄도 가을이다. 봄만 아니라 여름도 가을이고, 겨울도 가을이지만, 심지어 가을조차도 가을이다. 겨울도 곧 닥칠 것이다. 가능하면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은 어느 날 문득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
지금 살고 있는 작은 아파트로 이사한 것이 2003년, 내 나이 예순 일곱 되던 해였다. 우리 집은 일층인데, 일층의 좋은 점은 드나들기 편한 것 말고도 아파트의 뒤뜰이 곧 우리 집의 안뜰이라는 점이었다. 조금 좁기는 했지만 손자 녀석이 나가 놀아도 위험하지 않고 늘 가족들의 눈에 띄어서 좋았다. 그러나 나는 학교를 정년퇴임한 뒤였다. 쉽게 말해서 이미 늙은이가 된 것이다. 늙었다고 해서 나는 별 감회는 일지 않았다. 그저 쉰 살이거나 예순 살이거나 나이를 먹었다는 것뿐이었지 나이에 따른 감회, 특히 슬프다거나 처량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이는 나이였다. 우선 정년을 하였으니...
그 해 가을, 햇빛을 따라 변해가는 뜰이 눈에 띄면서 아하 이렇게 늙어가고 이렇게 죽어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를 의식해 가며 뜰과 거기 서 있는 나무들 그리고 풀, 거기 비치고 있는 햇빛을 들여다보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조금쯤 서글픔을 느꼈는지는 모르나 그저 담담히 찍어나갔다.
정년을 할 때 나는 내가 근무하던 학교에서 만 20년 6개월을 보낸 뒤였다. 아하, 이제 꼭 이만큼만 살면 나는 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 별 이상이 없으면 대개 여든 대여섯이면 죽는 것을 보고 나도 그 나이 되면 가겠구나! 생각했었는데 그 여든 대여섯까지 꼭 이십 년이 남았던 것이다. 아쉽다든가 좀 더 오래 살고 싶다든가 하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고 그냥 이십 년이 남았음을 의식만 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 뜰에서 내가 느낀 것은 그 뜰에 스며들고 있는 늙음의 그림자였다. 늙어가고 있는 내 모습을 그 뜰에서 느꼈던 것이다. 그렇게 찍다 보니 밖에서도 그런 풍경만 눈에 띄었다. 내가 그렇게 늙은 것은 확실하다는 뜻이리라. 그리하여 이 사진집을 “가을에서 겨울로” 정리하였다.
2021년 3월 ‘밝은 방’에서, 한정식
한정식 작가가 처음으로 카메라를 손에 넣은 것이 1962년, 지금으로부터 55년 전의 일이라고 한다. 전시를 준비하며 작가와 만난 자리에서 내놓은 당시의 사진 속에는 아직 이십대의 작가가 첫 카메라를 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흑백사진 속의 젊은 작가는 자신이 사진가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당시에는 학교 선생님으로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였다. 그러다가 1968년 홍순태 선생이 조직한 아마추어 사진동아리 '백영회'에 가입하면서 그의 사진가로서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가 사진에 입문할 당시는 '생활주의 리얼리즘'을 주창하던 임응식 작가가 한국사진을 주도하던 시기였다. 많은 사진가들이 리얼리즘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작품세계를 구축해 나갈 때 한정식은 조금 다른 길을 걸어왔다. 작가는 그 길을 '외로운 길'이라고 이야기한다. 현실성이 모자라는 성격 탓에 다큐멘터리 사진이라는 현실에 발붙이지 못하고 누구도 택하지 않는 뜬구름 같은 순수사진에발을 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그 길이 외롭고 힘들었을지는 몰라도 그 덕에 우리는 좀 더 폭넓게 한국사진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하나의 범주를 더 갖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정식은 사진을 통한 추상이라는 한국사진에서는 짧은 실험으로 그친 영역을 40여 년에 걸쳐 추구해 왔고, 이는 한국사진의 다양성을 위해서는 참으로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작품세계가 한국사진사 속에서 빛을 발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그가 형식주의라는 새로운 범주를 수용하여 발전시켰다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이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한국적 색깔을 찾아내고 온전히 한정식이라는 작가만의 고유한 형태로 발전시켰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이는 작품의 소재 혹은 주제가 한국의 풍경이라는 단순한 이유에서도 비롯되었지만 대상에 접근하는 그의 독특한 태도에서 비롯되기도 했다.
처음 사진을 찍기 시작했을 때는 그 역시 사진의 본질이 기록성을 떠나기 어렵다는 것에 공감했기 때문에 곧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되는 주변의 풍경들을 부지런히 기록해 나간 듯하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북촌'시리즈, '나의 서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작품집이다. 이 사진들에는 작가가 나고, 자란 서울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변해 가는 서울의 모습을 섬세하게 담아낸 사진들이다. 그래서 혹자는 그의 다른 작품 시리즈들이 '북촌' 시리즈와는 이질적인 시리즈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분명 그의 초기 사진들에서도 이후 작품들로 이어지는 몇 가지 단서들이 드러난다. 첫 번째 단서는 인물에 대한 태도이다. 한정식 작가의 '북촌' 시리즈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분명 인물이지만, 정물에 가까울 정도로 카메라 뒤의 작가와의 정서적 교감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최대한 그들의 감정 선을 건드리지 않고 멀리서, 혹은 가깝더라도 철저하게 관찰자의 태도로그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이후 그가 '나무'와 '발' '고요' 시리즈를 통해서 줄곧 유지해 온 사물을 다루는 침착한 관조자의 태도로 이어진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감정을 어지럽히거나 다치지 않고 인물의 형상만을 담아낸 것처럼 사물을 다루면서도 그는 사물이 가진 선과 면, 색에 주목했고 현상과 인화를 거쳐 인화지 위에 올라온 형상은 인물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변과의 연결고리가 사라진 오롯이 형상 그 자체로 남게 되었다. 또 하나의 단서는 바로 오랜 시간 공을 들여 곱씹어 가며 대상을 다루는 태도이다. '북촌' 시리즈의 풍경들은 작가가 나고 자란 어느 곳보다도 익숙한 풍경들이다. 오랜 시간을 두고 끊임없는 관찰을 통해 익숙한 공간들을 가장 적절한 프레임을 찾아 찍어 낸 것처럼 이후의 시리즈에서도 그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대상이 되는 사물을 관찰하고 이리저리탐색하며 사진을 찍었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렇게 긴 시간을 바라보다 보면 나무가 마치 인체의 형상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사람의 발이 과연 사람의 신체 일부일까 싶게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작가가 지닌 이 기본적인 태도들이 필연적으로 그를 이끌어 이후의 추상사진 시리즈들을 완성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의 추상사진 시리즈는 '고요' 시리즈에서 정점에 달한다. 고요에서 작가는 비로소 사물이 지닌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말 그대로 '고요한 사물의 정수에 도달한다. 우리는 그가 제시한 화면 속에서 구체적인 사물의 형상을 보고 있지만 사물들은 스스로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작가가 담아낸 프레임 속에 들어앉아 시간도, 빛의 움직임도, 소리도, 모든 흐르는 것들이 멈춘 채 오로지 '고요한 심상만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한정식이라는 작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는 우리에게 사진이론가로, 또 교육자로 더 이름을 알려 왔다. 아마 한국에서 사진을 한다는 사람치고 그가 저술한 사진예술개론을 읽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초판이 나온 것이 1986년이니 벌써 30년이 넘게 꾸준히 읽히고 있는 책이다. 꼼꼼한 작가의 성격을 반영하듯 이 책 한 권만 읽으면 기본적인 예술사진에 대한 이해와 사진의 기계적인 특성에 대한 전반적인 파악이 가능하게 구성된 보기 드문 사진이론서이다. 물론 이 책 이후에도 번역 및 저술활동을 통해 사진이론이 체계적으로 기반을 잡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또한 1982년부터 2002년까지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후학들을 양성해 냈다. 중앙대학교 사진과가 여타 대학의 사진학과에 비해 순수예술사진에 대한 지향성이 강하고 유수의 작가들을 배출해 낸 까닭 중 하나는 분명 한정식이라는 작가의 영향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국내 최초로 사진학회를 창설하고 잡지를 발행하여 한국사진이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는 동시에 1990년대 초반부터 급격하게 '메이킹 포토'로 쏠리는 한국 현대사진의 방향성을 균형있게 끌고 가려는 노력 역시 아끼지 않았다.
한정식 작가가 작가로서, 교육자로서, 그리고 이론가로서 척박했던 한국사진계를 풍요롭게 일궈왔다는 사실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을 듯하다. 특히 그가 완성해 낸 한국적 형식주의 사진은 한국사진사를 더 깊이 있게 폭넓게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번 전시가 한정식 작가가 평생을 바쳐 몰두해 온 추상사진의 세계를 온전히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장순강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
누군가 내 사진을 친화의 사진이라고 한 적이 있었다. 또 누군가는 목관악기의 음색에 내 사진을 견주기도 했다. 모두 내 사진에 친근감을 가지고보아준 사람들이라 그렇게 보였겠지만, 듣고 보니 그런 듯도 했다.
하긴, 나는 사물을 분석하고 비판하고 주장하는 쪽이기 보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음미하는 편이다. 있는 그대로의 그들을 사랑하고 받아들인다. 나는 내 눈에 띄는 사물이 무엇을 뜻하며, 그 사물이 나의 삶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가를 생각하고 분석하지 않는다. 않는다기보다 되지를 않는다. 다만, 그들 사물이 내 안에서 어떻게 공명하는가에 귀를 귀울인다.
우리나라 말에 ‘관조’라는 말이 있다. 내 사진에 담긴 내 정조가 있다고 한다면 이 ‘관조' 에서 그리 먼 것이 아니지 않을까 싶다. 또한, ‘직관’ 이란 말도 있다. 우리의 의식에 깊이 뿌리박힌 인식의 한 형태로, 나 역시 내가대상을 만나는 순간의 그 감성적 진실을 중시한다.
작품에 관한 한, 나는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서구적 체질에서 먼 느낌이다. 나무를 찍든, 발을 찍든, 풍경을 찍든, 나는 내 정감으로 그들을 감싼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진이 찍히지를 않는다. 내 체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지만, 내 체질만이 아니라, 우리 한국인을 비롯한 동양인의 보편적인 정서가 아닐까싶기도 하다.
왜 나무를 찍었는가, 왜 그토록 오랜 동안 발을 찍었는가고 물으면 얼른 그 대답을 찾기가 어렵다. 솔직히 말해서, 그냥 찍은 것뿐이다. 나무가 좋아서 찍었고, 우연히 발이 눈에 들어와 찍기 시작한 것뿐이다. 나무건 발이건 그 소재의 어떤 특성을 깊이 생각하고 그것이 내게 준 의미를 찾아 찍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 소재가 내 안에서 나와 만나 빚어내는 화음을 찾아 그를 읊어 낸 것이다.
만남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만남은 우연히 이루어지지만, 만나고 나서부터 진지한 동행은 시작된다. 특히, 마음을 끄는 소재는 한번 스쳐 지나가 버리지를 않는다. 마음에 머물러 언제고 다시 찍고 싶어진다. 서로의 이해를 통해 만남이 깊어지듯, 정이 통하는 소재와는 그래서 긴 동반 여행이 시작된다. 나무를 아직도 관심 깊게 관찰하고 있고, 발을 십여 년간 찍었고, 이십 년이 다 되도록 아직도 서울을 찍고 있고, 지금의 이 풍경도 벌써 십여 년을 찍어 왔다. 이것이 다름 아닌 이런 만남이라는 것일 게다. 그리고, 그게 내 사진인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풍경을 많이 찍는다. 자연 그대로의 풍경도 찍기는 하지만, 대체로 자연과 인간이 어울려 만들어낸 문화적 풍경에 주로 눈길이 간다. 하기야, 자연이 자연 저 혼자 존재할 수 없고, 문화가 독자적으로 형성되는 것도 아니고 보면 풍경에 인간의 흔적이 묻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풍경이라는 것이 산과 구름 말고도 온갖 사물이 어울어져 이루어내는 교향악 같은 것이라는 생각은 줄곧 해 왔었지만, 그 여러가지 속에 거기 사는 사람들의 심성도 진하게 섞여 있다는 것은 이번의 작업을 통해 얻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우리 들녘의 풍경은 그런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다. 추수뒤, 논 바닥에 엮어 놓은 짚단은 그대로 우리들 민초의 모습이었다. 허리 아프게 살아온 우리들 서민의 모습이었다. 하필 짚단만이 아니었다. 요즈음 농사에 흔히 쓰이는 비닐 조각들도 그렇고, 바위나 나무나 풀들이 모두 그랬다. 질박하고 평화롭게 살아온 우리 조상들과, 그들의 심성을 닮아 있었다. 내가 찍고자 한 것은 이것이었다. 주변 사물과 우리들 민초의 형태적 유사성을 넘어선 곳에 깃든 그 심성이었다.
온갖 사물이 주변 경관과 어울려 이루어낸 풍경에서 나는 '풍토' 라는 낱말의 뜻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자연에 밴 사람들의 내음, 사람들 심성에 깃든 자연의 향취를 이 낱말은 풍기고 있었다. 이것은 하필 우리나라 풍경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일본은 일본대로 미국은 미국대로 서로 저들을 닮은 풍경과, 풍경을 닮은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나라마다 그 풍경이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다른 까닭이 거기 있지 않을까 싶다.
이들 풍경 말고도 우리의 땅을 찍은「지도」를 위시해 내 고향으로서의 「서울」등등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하고 있는 사진들이 조금 더 있다. 내 관심은 이렇게 다양하지만, 그렇다고 그들 대상을 대상 그대로의 다양한 가치로 존중하고자 하는 것이 내 뜻은 아니다. 대상이 무엇이건, 나는 내 식으로 깎고 다듬어 내었다. 처음, 「나무」를 펼쳐 놓고, 나도 모르게 이건 내 목각이야, 중얼거렸던 기억이 난다. 특히 인화 과정에서, 가려 굽고, 더 태우고 하면서 나는 나무를 깎고 다듬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히곤 했었다. 「발」도 그랬지만, 이번의 풍경도 나는 역시 참으로 정성껏 다듬었다. 「풍경론」이라 이름 붙인 까닭은 그래서이기도 하다.
내 사진의 출발점이 여기 있었다. 나는 대상을 한 번도 대상 자체의 객관적 실체로 파악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나무는 나무가 아니었고, 발은 발이 아니었고, 풍경은 풍경이 아니었다. 하기야, 리얼리티라는 것 자체가 대상의 실체성을 전제로 하는 말이 아니었고, 애초에 실체라는 것 또한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다. 세상 만물에 자성이 없다는 부처님 말씀은 이런 뜻까지를 포함한 것이겠지만, 사실상, 모든 사물은 각 개체의 인식에 의해 그 정의가 내려지고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 절대적 가치나 의미가 미리부터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을 내 체온으로 품어 부화시켜내는 것, 그것이 지금까지의 내 사진이라는 생각이다.
관조라는 말이 애초에 주관성이 배제된 마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런 내 사진은 관조와 별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스스로'관조'를 입에 올린 것은 내가 어떤 의도로, 또는 어떤 의지를 가지고 대상을 일부러 왜곡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자연이 눈 앞에 저절로 펼쳐져 있듯, 내 사진 또한 정성껏 다듬다 보니 형성된 자연스러운 내 모습이지, 모양내려고 거울 앞에 앉아 화장을 한 얼굴이 결코 아닌 것이다.
앞으로도 내 사진에 커다란 변화는 아마 없을 것이다. 변화가 아니라, 올바른 정리나 하고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별로 한 것도 없이 이만큼을 살아 온 것이다. 바라기는, 나이와 함께 내 사진에도 무게와 깊이가 더해졌으면 하는 것뿐이다.
1997년 6월, 한정식
서울 북촌 지역에서 태어나 자란 작가가 자신의 고향 이야기를 흑백사진 80여 점과 글로 풀어 낸 사진집이다. 서울은 1960년대 후반부터 산업화시대로 접어들면서 빠르게 변화해 왔다. 500년 역사도시의 면모를 그나마 잘 보존해 오던 북촌의 아담한 한옥들과 정다운 골목들이 사라지는 데 안타까움을 느낀 작가는 서울 토박이로서 남아 있는 서울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해 놓았다.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 사이에 자리한 곳으로 한옥이 밀집되어 있는 전통 주거 집단이다. 이 책에는 널리 알려진 가회동, 안국동, 삼청동을 비롯해 여전히 역사적 흔적을 간직한 운니동, 사간동, 누하동, 견지동, 계동을 포함한 27개 동의 모습과 저자의 추억담이 함께 펼쳐진다.“시간이 갈수록 빛을 발하는 독특한 매체”로서 사진의 장점을 살리며 북촌의 풍경을 생생히 담아내고 있다.
현대미술 분야에서 사진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높아지면서 사진에 채색을 가하거나 여러 장의 사진을 한데 모아 한 장의 사진으로 선보이는 경우도 많아졌다. 이른바 ‘구성사진’이니 ‘만드는 사진’이니 하는 것들로 전통적 사진의 위기감이 팽배해 왔다. 촬영된 현실을 인화지 위에 재현하는 사진의 프로세스에 큰 변화를 맞이한 것이다.
이 책은 ‘시간성’과 ‘빛’이라는 사진의 본질을 중심으로 사진의 정체성을 찾아나가고 있다. 저자는 시간과 빛을 사진의 키워드로 상정하고 시간성을 무시하는 이른바 ‘만드는 사진’은 사진이 아닌 회화로 보고 있다. ‘만드는 사진’에 대한 거부반응은 그것이 사물의 현재 모습을 찍는다는 사진 메커니즘을 거부하고 있고, 사진에서 시간이 결여되면 회화성만 남게 되므로 사진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시간과 빛이라는 축을 바탕으로 사진이 성립하고 이 두 가지 축에 의지할 때 사진은 그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역설하면서 다른(회화적) 요소가 개입하면 사진은 그 순수성을 잃고 회화가 되거나 사진을 이용한 또 하나의 시각예술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사진술의 놀라운 발달은 최근 디지털 사진으로 종합되고 있으며, 일반인들에게 카메라는 이제 디지털 카메라를 뜻하게 되었다. 저자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디지털 사진에 할애하고 있는데 디지털 사진에서도 사진의 사실성은 유지될 수 있다는 점에서 사진의 디지털화를 긍정적인 변화와 발전으로 받아들이고 있어 주목된다.
이 책은 그동안 사진에 대한 논의가 전무한 한국 사진계의 실정에서 서구의 이론에 기대지 않고 자생적으로 나온 사진론으로서 그 가치가 있다 하겠다. 사진가이면서 사진교육자로서 활동해 온 저자는 오랜 기간에 걸친 사진에 대한 경험과 사유를 바탕으로 사진의 본질과 미래에 대한 귀중한 에세이를 저술해 냈다.
내 사진은 사물의 존재로 향하고 있다. 특히 물, 돌, 풀 등 자연 자체에 대한 관심이요. 애정이라 해도 좋다. 이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내가 왜 자연으로 눈을 돌린 것일까. 사람 얘기, 사람 사는 사회에 대한 관심이 사진의 주요 관심사항이요. 사진의 정체성을 거기에서 찾는 것이 보편적 사진 인식임은 잘 알지만, 그리고 나 자신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다 내 눈을 끄는 것은 대개의 경우 인간을 떠난 자연이다. 현실도피가 아닐까 생각해 본 적도 있다. 그리고 그런 면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언제나 내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것은 자연이다. 그처럼 자연을 마주하면 언제나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난 듯 가슴이 트인다. 자연이 어떤 구체적 메시지로 다가오는 것은 아닐지언정 그런 구체적 메시지보다 더 절실한 메시지를 그 자연에서 느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내가 지향하는 자연의 사진이란 이런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 풍광의 재현이 아니라, 그 속 깊이 잠겨 있을 시원에 대한 향수, 하늘이 열리던 때의 그 아득함을 생각한다.
내가 진작부터 모색해 오던 어떤 경지, '적정 적멸(寂靜寂)' 곧 '공(空)의 경지라는 것도 결국은 사물의 근원적 존재 양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움직임이 사라진 고요. 움직임도 움직임 아님도 아닌 고요. 다시 말해서 생성, 소멸을 벗어나 형태도 사라지고 존재감마저 느껴지지 않는 그런 경지. 소설가 김훈의 글에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구르는 자전거 바퀴의 중심에는 움직임이 없다 한다. 중심이 움직이면 바퀴는 구를 수가 없다 한다. 대신 밖의 테두리가 요란하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태풍의 눈이 그러하듯 모든 움직임의 중심은 결국 고요하다는 뜻이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종말인 거기에 '공'은 열려 있다. 그 곳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내 <고요>의 또 하나의 목표, 아니 보다 커다란 바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욕심일지도 모른다. 왜냐 하면 너무나 아득한 목표일 뿐 아니라, 사진, 아니 인간의 어떤 언어로도 이룰 수 없는 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에서 잠시 썼듯 비언어적 매체를 통한 관념의 영상화는 일종의 모험이다. 오히려 내 의도를 벗어나 전혀 다른 의미로 확산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그리하여 그 언저리까지만 가도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 사진집을 엮어 보았다.
2013년 5월 ‘밝은 방’에서, 한정식
이 책은 사진이 독립된 예술로 자리를 잡기까지의 과정을 간략하면서도 알기 쉽게 정리한 책이다. 예술로 향한 흐름을 크게 한 줄기로 잡은 뒤, 그 굽이에 얽힌 의식, 실험, 문제점 등을 명확하게 잡아 해설을 하고 있다. 특히, 제2부에 예술로서의 사진이 갖추어야 할 양식, 개성 등에 관한 구체적 논의를 실어, 사진의 예술적 전개는 물론, 사진 미학상의 여러 가지 문제 이해에 커다란 도움이 되게 짜여 있다.
역자가 다 늦은 나이에 일본대학 예술학부 사진학과로 공부하러 갔을 때, 카나마루 선생님의 '사진 예술론' 강의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교재가 이 책이었다. 불행하게도 선생님께서 그 강의를 끝으로 다음해 늦가을 돌아가심으로 해서 역자가 받은 강의는 선생님의 마지막 강의이기도 했다. 역자가 짧은 유학을 마치고 귀국 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사진학과에 봉직하게 되면서 맡게 된 '사진론' 역시 이 책을 바탕으로 강의를 해 오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전공 학과의 교재로 그치기엔 그 내용이 너무 아까왔다. 전공 학생들만이 아닌 일반 대학생들이나 사진에 진지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읽히고 싶었다. 때마침 사진에 관한 관심과 연구가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하고, 사진에 관한 저술도 활기를 띠고 있는 요즈음이다. 이 책도 이러한 활발한 사진 연구에 한 디딤돌이 되리라 믿어 감히 번역을 해 보았다.
한 가지 양해를 바라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긴 해도, 일본에 관한 기술 중 일본 사진계에나 해당되는 부분은 우리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해서 생략했다는 점이다. 저자이신 카나마루 선생님께 누가 되는 일이나 아닌지 염려되어 굳이 밝혀 둔다.
1988년 2월, 한정식
이번에 출판사를 바꾸면서 새로이 개정판을 낸다. 판을 바꾸는 김에 몇 군데 손을 대기는 했지만, 그간 사진 상황에 커다란 변화가 없어 고칠 곳이 별로 없었다. 디지털 사진에 관한 글만 약간 보충하고, 나머지는 눈에 거슬리는 문구라든가 용례 등에 조금 손을 대는 정도로 그쳤다. 몇 년 후 사진 상황을 보아서 다시 손을 대게 될 때 한꺼번에 대폭적으로 수정을 할 생각이다. 그러나 이왕 바꾸는 터에 인상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어 사진은 많이 바꾸었다. 이번에도 어쩔 수 없는 몇 장은 외국 작가의 것을 썼지만, 조금 무리가 있어도 가능한 한 국내 작가들의 작품으로 메우기로 했다. 그러한 의식이 우리 사진을 발전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
2000년, 두 번째 개정판의 머리말을 쓸 때만 해도 우리나라 사진교육계는 활발했었다. 각종 대학의 사진 관련 학과가 40여 곳이나 설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겨우 4년이 지난 지금, 사진교육계는 진통을 겪고 있다. 불과 몇 년 후를 내다보지 못한 단결, 간판만 달면 학생이 오는 바람에 마구 세운 사진과의 난립이 오늘의 혼란으로 이어진 것이다. 구조 조정 없이는 존립도 어려운 학교도 있고, 통폐합을 하지 않고서는 학과를 유지할 수 없는 학교도 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 사진 상황이 나빠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갈수록 좋아지고 있다. 사진은 이제 문화예술계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중이다. 일류 미술관과 화랑이 사진에 문을 열기 시작하더니, 드디어는 사진미술관이 생겼다. 각종 사진상도 늘었고, 아직 완전히 자리를 잡지는 못했어도, 어떤 지방에서는 사진 축전을 연례행사로 마련하기도 했다. 사진학과의 진통도 숨을 고르느라 지금잠시 어렵기는 하지만, 구조조정을 거치고 나면 안정되어 더욱 발전할 것이다. 한국에서 사진을 하는 것이 자랑스럽게 생각되는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전에도 썼지만, 이 책이 출판된 지 이십 년이 다 되도록 아직도 용도 폐기가 되지 않은 것은 필자로서는 고마운 일이지만, 우리나라 사진계를 위해서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보다 더 좋은 책이 하루라도 빨리 나오기를 바라지만, 그래도 이 책의 수요가 있는 이상은 필자 역시 책임감을 느끼고 보다 좋은 내용으로 가꾸어 가도록 노력할 것이다. 많은 격려와 성원을 바란다.
2004년 2월 '밝은 방'에서 한정식
학생들 가르치는 게 직업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라도 필자는 사진이론을 공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름대로 연구한 것을 그간 몇 권 발표하기도 했다. 비교적 호평 속에 지속적으로 그들 책이 판매되고 있는 것은 지은이로서 큰 보람을 느낀다. 거기에는 다른 이들이 그런 책을 쓰는 일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은 덕도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필자로서는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우리 사진계로 보아서는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간 필자가 낸 책들은 전문가를 지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어서 일반인들이 접근하기에는 좀 문제가 있었다. 그뿐 아니라 일반인들의 사진예술대한 관심과 수요는 급증하는데 이들을 친절하게 안내해 주는 책자가 거의 없었다. 바로잡혀야 할 일이라 생각되었다.
이 책은 그런 일반 독자들을 위하여 씌어졌다. 때문에 사진이란 무엇이며 어떠한 예술인가를 가능한 한 알기 쉽고 흥미롭게 풀어 나가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생활 주변에서 주제를 잡아 수필 형식으로 풀어쓰되 비교적 짧게 하고 항목마다 알맞은 사진을 배치하였다. 이 책의 초간본(사진 - 시간의 아름다운 풍경)이 나온 때가 1999년으로, 이때만 해도 이런 식으로 사진과 글을 합해 발표한 책이 거의 없었다. 필자는 그런 발표 형식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위한 전단계로 이 책을 기획하여, 전에 사진전문지 등에 연재하였던 것들을 한데 모아 정리하여 출간했던 것이다.
이번에 책의 제목과 체재를 바꾸었다. 일반 독자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뜻에서였다. 용례 사진들도 많이 바꾸고, 글도 몇 개 빼는 대신 몇 개를 새로 더 써넣었다. 사진은 시간의 풍경'이라는 생각에서 기록성 중심의 글로 초간본은 채워졌지만 이번에는 예술성에 대한 비중을 기록성만큼 중시하는 쪽으로 방향을 조금 틀어 놓았다. 기록성이 중요한 사진의 가치임에 틀림은 없지만, 기록성에서 벗어난 순수예술로서의 사진 역시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뜻에서였다. 디지털 사진이 요즈음 크게 보급이 되어 사진예술에도 변화가 기대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디지털 사진에 대한 글을 따로 써넣지는 않았다. 디지털이든 아날로그이든 사진이라는 근본에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옷을 갈아입었다고 해서 사람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은 사진으로서 향상할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기도 하다.
오늘날 사진예술은 미술계는 물론이요,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사진에 대한 이해는 이제 교양인의 필수과목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작은 책자가 이러한 시대 상황에 부응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2007년 3월 ‘밝은 방’에서, 한정식
책을 내려니 두 가지 걱정이 앞섰다.
첫째는 이러한 논의를 지금에 와서 과연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사실 이 책을 구상한 것은 십 년쯤 전의 일이었다. 당시 우리 사진계에 소위 '만드는 사진'이 열병처럼 번지고 있었다. 특히 일부 젊은 사진가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사진이 '새로운 사진'으로, 종전의 스트레이트한 사진은 낡은 사진으로 받아들여지는 느낌까지 있었다.
사진으로 반생을 살아온 입장에서 이것은 문제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코 기성세대의 권위 훼손 우려의 차원이 아니라, 사진 미학적 입장에서의 우려였다. 머릿돌이 바로 앉아야 집이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 '만드는 사진'이라는 비학술적 용어로 불리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름으로 등장한 '구성사진'은 결국 한때의 유행에 지나지 않는다. 여인들의 치마 길이와 그 근본에서 별로 다름이 없는 것이다. 모더니즘의 다음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면 그 다음에는 또 다른 '이름'이 나올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러나 세상을 보는 관점이 어떻게 바뀌든 물은 물이 산은 산이다. 이름에 관계없이 근본적으로 사진은 사진일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는 시의에 묶이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더구나 우리 사진계에서 이러한 논의가 진지하게 있어 본 적이 없었다. 이미 있어야 했던 일을 이제야 한다는 자책감이 앞서기도 했지만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바로 시작할 때라는 속언을 빌려 일단 쓰기로 마음을 굳혔다.
두 번째 걱정이 내 지적 수준의 문제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안고도 나는 이미 몇 번이나 일을 저지른 바 있다. 글만이 아니다. 작품이랍시고 발표한 내 사진들이 이러한 어리석음을 여실히 보여준 것 같아 지금도 모골이 송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이런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것은 이나마라도 우리 사진학계에 자그마한 도움은 되지 않을까 해서이다. 심도 있고 고매한 이론은 후학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그 수준으로 올라가기 위한 사람들의 받침돌이 되는 것도 뜻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헛소리는 하지 않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할 말은 하되 지나치지 않고, 독단이 되더라도 논리적 합리성을갖추고자 노력했다. 설득하고자 하는 열의만이라도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막상 책을 쓰게 되자 또 한두 가지 고민이 생겼다.
사진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룬다고 사진 교과서로 만들어 평면적인 서술을하기는 싫었다. 더구나 사진을 전면적으로 모조리 검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마치 인생론 우주론을 한 권의 책에 담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일이요, 될 수없는 일인 것이다. 결국 그 몇 가닥만 잡아 진지하게 논해 보기로 했다. 풀 한 포기,돌 하나를 가지고 고민하는 것이 보다 실질적인 접근 방법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내가 읽은 책의 양도 문제가 되었다. 내 게으름도 탓이긴 하지만 나는 도대체 읽기 어려운 책은 읽지 않았다. 그런 독서량으로 무슨 권위 있는 책을 쓰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진에 대한 생각은 누구 못지않게 많이 했다. 가르치기 위해서도 그러지 않을 수 없었지만 '사진'은 아직도 내 뇌리 한가운데에서 떠나지 않는 물음표이다. 칠십 나이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지만 이제 사진에 대한 내 생각을 내말로 얘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은 겪어 왔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내 말에 대해나 나름으로의 책임은 질 수 있다는 자신은 가지고 있다. 남의 말을 원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로되, 직접 인용을 거의 하지 않은 것이 이 때문이다. 사십여 년에 걸친 학교생활의 절반 이상을 사진을 가르치면서 지내 왔다. 그 간의 인연으로 나와 얽혔던 많은 제자들에게 고마운 인사의 말을 전하고자 한다. 그들로 해서 내가 있었고, 그들로 해서 내가 자랄 수 있었다. 그러한 거래를 떠나서도 그들은 내 든든한 이웃이다. 사진계의 많은 선후배, 동료들이 그러하듯, 학교를 일단 떠났으니 이제 사진 속에서만 살 것이다. 이제부터는 사진 찍기에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하겠지만 문득 사진에 관한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면 짧은 글로라도 발표할 작정이다.
여생을 여생으로 소모하기보다, 여생을 여생으로 누리다가 가고 싶다.
2003년 9월, 한정식
필자는 몇 년 전, 이십 년간 몸을 담고 있었던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에서 정년퇴임을 했다.
정년퇴임을 맞아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이제부터는 아마추어 작가들에게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다는 것이었다. 전문가 집단은 나보다 젊은 작가, 평론가 들이 속속 자라고 있으니 그들에게 맡기고, 아마추어 작가들, 특히 한 걸음 더 내딛고자 노력하는 작가들, 의미 있는 사진을 하고자 애를 쓰는 작가들을 돕는 일이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두어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나 자신이 아마추어 작가 출신이다. 모 신문사 콘테스트에 입상한 것이 내 사진의 출발점이었다. 그때에는 사진 전문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다만 취미의 일환으로, 내 삶을 보다 기름지게 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열심히 찍기만 했다. 그때 가장 아쉽고 답답했던 것은 어떤 사진이 좋은 사진일까, 어떻게 해야 그런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좋은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은 간절했으나, 간절한 생각만으로 좋은 사진은 찍히지 않았다. 당시에는 기술서적 몇 권밖에는 사진에 관한 책이 거의 없던 때였다. 가르쳐 주는 사람도, 배울 데도 없었던 아쉬움을 나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둘째,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우리나라 역시 전문집단과 아마추어 집단 사이의 사진 인식의 간극이 너무 넓어 서로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예술계보다도 전문가와 아마추어의 인식의 차이가 너무 컸다. 누군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 이 틈을 메우는 데 필자 이상의 적임자도 드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이 글을 쓰게 된 또 하나의 동기였다.
필자는 아마추어 작가생활을 경험했고 따라서 아마추어 작가들의 가려운 곳, 궁금한 점을 비교적 잘 아는 편이다. 그리고 사진교육에 이십여 년간 몸담아 온 경력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몇 권의 책을 낸 경험도 있다. 그 중에서 『사진예술개론』은 대학의 교재로만이 아니라 아마추어 작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 20여 년간 판을 거듭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이 대체로 이런 까닭에서였다.
이 글은 「사진예술개론을 의식하고 출발하였다. 사진예술개론이 이론중심이어서 이번에는 실기 중심으로 방향을 잡아 두 책을 양립시키고자 한 것이다. 작품 제작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요소들을 골라 되도록 자세히, 이해하기 쉽게 서술하였다. 그러나 기술적인 문제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 기술에 관한 책은 이미 많이 나와 있을뿐더러, 기술은 부차적인 것이요, 특히 기술이라는 것이 소용이 없을 정도로 요즈음 카메라들이 발달한 때문이다. 실기를 중심으로 한다 해도 이론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책을 쓸 수는 없는 것이다. 특히 사진에서 중요한 것은 사진 인식이라고 보아, 올바른 사진인식을 심어 주기 위한 기본적이고 중심적인 이론을 군데군데 담아 놓았다. 용례 사진을 가능한 한 풍부하게 실으면서 설명도 자세히 해 놓았다. 작품제작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를 바라서였다.
2010년 9월 ‘밝은 방’에서 , 한정식
전부터 생각해 오던 책이 있었다.
사진과 글의 만남.
사진과 글을 한 책에 묶되 사진이 글을 보조하지 않고, 글이 사진 설명에 그치지 않는 그런 책. 서로가 따로 서되, 만나서는 서로 어울리어 새로운 경지를 여는 그런 책을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그 첫 시도로 이 책은 엮이었다.
사진에 대한 이해라고 하는 이 책의 성격상 사진이나 글이 따로 설 수가 없어, 서로가 서로의 한 부분으로 얽히어 서로를 보완하고는 있으나, 그렇다고 종속적 관계이지가 않도록 사진과 글 양쪽에 독립성을 살리려고 나름대로는 신경을 많이 썼다. 언젠가는 처음의 생각대로 사진과 글이 따로 서서 서로를 주장하며 서로 어울리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런 책을 한번 만들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이 좀체로 될 일 같지가 않아 여기 기약을 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 근처에나마 가 보도록 노력은 할 생각이다.
사진에 대한 이해라는 것도 그렇다. 교육자라서가 아니라도 늘 사진을 생각해오던 터였다. 그래서, 대학에서도 사진 예술론을 중심으로 한 이론 과목에 신경을 많이 써 왔다. 그러나, 사진에 대한 내 생각이 전문가 집단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사진가 혼자만 서 있을 수도 없거니와 주변의 이해 없이는 사진의 장래 또한 밝을 수가 없다는 생각에서다. 십여 년 전에 낸 사진예술개론도 그런 취지에서 일반인에 대한 배려를 상당히 해가면서 쓴 책이지만, 이글 역시 그런 바탕 위에서 씌어졌다. 더구나, 오늘날 사진은 문자 이상으로 일반
화하여 더 이상 사진 전문가들만의 영토를 벗어나 버린지 오래요, 원래가 대중에게 친근한 벗이었다. 그렇다고 건방지게 대중을 계몽하겠다는 신파조 의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진에 반평생을 바친 사람으로, 더욱이 선생이라는 직업의식에서 평소에 해오던 생각을 널리 한번 펴 보겠다는 그런 생각인 것이다.
여기 실린 글들은 「사진예술』에 이 년간, 그리고 금호문화에 일 년간 연재했던 것들로, 그 중 일부를 갈아 끼우고, 보태고, 새로이 고쳐 써서 실었다. 연재 당시의 호응에 힘입어 출간을 결심하게 되었거니와, 당시에 못지 않은 격려를 기대해 본다.
1997년 6월, 한정식
사진의 길에 들어선 지도 벌써 오십 년이 지났다. 사진을 하면서부터 늘 사진의 기록성에 대한 중요성을 듣고 배우면서도 나는 그 기록성에서는 먼 길을 걸어왔다. 그러면서도 지난 밀착인화들을 들여다보다 깨닫고 느낀 것이 있었다. 이제는 사라지고 없어졌거나 아직은 남아 있어도 곧 사라질 것들이 눈에 띈 것이다. 의식하고 느껴서만이 아니라 무심한 사진들에도 들어 있는 것, 그것이 사진의 기록성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엮으려고 보니 부족한 점이 많이 보였다. 내 주변에서 내가 보고 느낀 것들만 찍었기 때문에 어떤 질서나 줄기가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눈에 띄었다. 그러함에도 엮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은 옛것들이 새삼스러운 의미로 다시 읽혔기 때문이다.
사진을 한 지 오십 년이 넘었으면 깊이 있는 책을 써야지, 이런 책을 내어야할 의미가 있겠나 하는 의구심도 들었지만 내 나이 팔십을 훨씬 넘어서 중순에 들어서 있었다.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이런 일도 할 수 있구나 하는 것으로 핑계와 위안을 삼기로 했다.
2020년 9월 ‘밝은 방’에서, 한정식
갑자기 이 책을 내게 되었다. 갑자기'라는 것은 불과 두어 달 전만 해도 생각하지 않던 일이었다는 뜻이다. 생각도 않고 있다가 내게 되어, 과연 이 책을 내어도 좋을지 잠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 나는 사진의 정체성은 시간성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늘 그렇게 말해 왔다. 학교에서는 물론이요, 아마추어 작가들이나 사진을 취미로 하는 동호인들 모임에서나, 사진에 대해 얘기할 때에는 언제나 이 바탕 위에서 말을 하곤 했다. 사진을 공부하면서 얻은 확고한 생각이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내 사진은 시간성과는 전혀라 해도 좋을 정도로 관계가 없는 쪽에서 작업을 해왔다.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내 기질 탓이었다. 우리는 모두 부대끼며 살고 있다. 이 고단한 삶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또 그들과 부대끼며 싸워야 했다. 그러나 그런 싸움에 나는 늘 자신이 없었다. 싸우면 으레 졌다. 말싸움이라도 이긴 적이 거의 없었다. 이런 내가 사람들과 부대끼며 그들의 삶을 기록한다는 것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나는 결코 명석한 편이 못 되는 사람이다. 우리의 삶을 기록하려면 삶에 대한 통찰력이 있거나, 상황을 판별하는 날카로운 눈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에서도 역시 싸움처럼 나는 자신이 없었다. 주어지는 상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아왔지, 한 번도 그러한 상황에 각을 세워 대립해 본 적이 없다. 비판이야 좀 해보았지만 남들 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뒷공론정도였다. 내 이런 눈과 이런 정신으로 우리들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나 깊은 천착은가 다룰 영역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해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을 정했던 것이다. 순수사진으로 향한 것이 그래서였다.
시간성을 벗어난 곳에서도 사진의 존재 이유는 분명 있다고 생각했던 탓도 있다. 그리하여 이쪽에서 사진의 존재 이유를 찾는 일에 내 사진적 정체성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사진집을 내어도 좋을까 하는 고민이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여기 이 사진들은 내가 평생의 작업으로 삼아 해 온 것들이 아니다. 그저 내 눈에 띈 사회적 풍경을 가벼운 마음으로 찍어 모은 것들이다. 신경을 써서 발표한 그간의 사진들도 별로 남을 만한 것을 만들어내지 못한 주제에 이렇게 주워 모은 것들로 엮은 사진집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거미줄에 걸린 곤충들 거미가 먹이로 삼듯, 내 의식의 그물에 걸린 여러 풍경들이 결국은 내 의식이요, 의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깊이 판 우물에서 얻은 물만 마셔야 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들을 펼쳐놓고 보니 내 사진 인생의 한 궤적이기도 하지만, 이들을 모아 놓으면 그게 바로 우리의 역사의 한 단면이기도 했다. 곁가지로 찍을 당시에는 생각도 못했던 사실들이 내 뜻과 관계없이 발견되기도 한다.
정체성이라는 것도 그렇다. 내 사진적 정체성을 하필 어떤 형식적인 장르에서 찾아 세워야 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어떤 형식을 취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왔느냐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정체성의 문제도 아니다. 정체성도 아니요, 이념도 아니요, 오로지 살아남는 것 아니 그렇게 힘주어 말할 것도 없이 그냥 사는 것, 사진 찍으며 사는 것, 이 이상의 명제는 없을 것이다.
이 사진들 대부분이 찍은 지 제법 된 것들이다. 소위 '작품'으로서는 별볼일없는 물건일지는 몰라도, 그렇게 지나온 우리의 삶을 지금의 시점에서 돌이켜본다는 의미에서는 그런대로 재미있겠다 싶어 출판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늙으면 회고하는 일밖에 별로 할 일도 없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곁들여서이다. 그러고 보니, 내 나이 올해로 일흔이 되었다. 내가 어느새 이렇게 살아온 것이다.
요즈음 세상에 일흔이 많은 나이가 아니기는 해도, 이제 이쯤 된 나이에 무슨 일을 저지른들 양해야 구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혹여 저지를지도 모를 잘못에 양해나 구하려 나이를 들먹이고 있는 게 좀 부끄럽기는 하지만.
2006년 3월 ‘밝은 방’에서, 한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