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空像, 空相), 한정식 작가의 세계–내–이미지
한정식 작가는 사진 자체가 진리(본질)가 아니라, 사진이 진리를 드러나게 하고, 진리에 이르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진리를 드러내는 방편으로, 사진 교육자이자 작가로서 사진을 대할 때 엄중하고 엄격한 절차를 중시하고 사진이 담아야 할 의미를 충분히 끌어올려 형식과 내용이 다툼이 없는 조화로운 세계를 견지했다. <고요>가 전시되고 사진집으로 묶여 세상에 나올 때마다, 세계-대상-피사체의 동일성을 지향한 작가의 정교하고 빈틈없는, 의미로 꽉 찬 사진 재현은 좀체 변하지 않을 것 같은 형식처럼 생각됐다.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작품들은 감각과 지성이 교차하고 선명하게 흔들린 멈춤, 혹은 구체적인 상 속의 떨림 같은 비의(秘意)적인 자유가 흐른다. 무엇일까. 이 내밀한 이미지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고, 아무것도 볼 수 없는데, 그 무엇도 아닌 ‘어떤 것’이 ‘있는’ 사진. 한정식 작가의 미발표작에는 그러한 것들이 (고요 속에서) 소란스럽게 생성하고 있었다. 필자는 그것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했는데, 바로 공(空)이었다. 한정식 작가의 사진에 들어 있는, 보이지 않는 이것은 공(空)이다! 이 텅 빈 이미지는, 놀랍게도 작가가 그동안 발표했던 ‘고요’ 시리즈를 촬영한 필름 곳곳에, 사이에, 끝에 아무렇지 않게 그냥 있었고, 어떤 연유에선지 세상에 전시될 선택권을 놓친(받지 못한) 사진이다. 이 사진 옆과 위와 아래…에 있던 사진들은 밖으로 나와 자신이 작품임을 입증하고 있었다면 이번에 전시된 사진들은 오랜 시간 빛을 머금고만 있었다. 자신의 몸에 닿은 그때 그곳의 빛을 기억하며, 사진의 시공 속에 고요히 머물렀다. 선택받지 못한 필름들이 선택된 필름 사이에 있었다는 사실은 무척 중요하다. 왜냐면 한정식 작가는 사진의 대상성을 주목해 온전한 형식으로 사진을 촬영하는 도중에 무엇도 아닌, 이름 붙일 수 없는 사진을 찍은 것이다. 이들은 서로 연결 되어 있었고, ‘A’컷을 찍었기에 ‘a’컷이 탄생 될 수 있었다. 상(像)이 선명한 컷과 상(像)이 흐릿하거나 지워진 컷은 공존해야 하는 이미지였던 것이다. 당연히 한정식 작가의 기발표작이 사진의 본질에 닿으려는 욕망에 충실했다면, 선택 받지 못한 이 사진들은 ‘고요’의 의미도 모르고 다만 정적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어떤 것을 찍은 채 숨 쉬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이번 전시는 한정식 작가의 세계–내–이미지, 공상(空像, 空相)이 드러나는 전시라고 생각한다. 한정식 작가의 세계를 이루는 모든 이미지들은 텅 빔 속에서 탄생하거나 텅 빔의 작용을 통해 이뤄진 사진이다.
필자가 명명한 ‘세계-내-이미지’와 ‘공상(空像, 空相)’은 한정식 작가의 작업 세계의 근간을 이룬 불교의 연기설에서 영향을 받은 말이다. 세계 내 모든 존재는 상호 관계에 의해 의미 지어지거나 의미가 지워지고, 존재는 세계 속의 인연(因緣)에 따라 계속 변화한다는 것이 연기설의 요지이다. 다양한 존재가 다기하고 다채롭게 움직이다 인연이 되어 만나고 흩어지는 것.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바라보는 일은 중요해진다.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즉, 학습 받은 데로 보는 것이 아닌, 대상이 드러낸 본무자성(本無自性)을 이해하는 것이고, 이것을 부처는 공(空)으로, 노자는 도(道)라고 일컬었다. 텅 비어 있는 것 같은데 무언가 드러나는 상이 ‘공상(空像)’이고, 모든 상(像, image)은 상호 연결 속에서 일어나고 이루어지는 것이 ‘공상(空相, co-existence)이다. 모두 세계 속에서 인연에 따라 현현(顯顯)하는 것이다. 한정식 작가의 강렬한 흐릿함과 소용돌이치며 빠르게 움직이거나 적막을 이루는 이 이미지들은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함에 대한 메타포이다.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 모두 공(空)에서 비롯되고 공(空)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부연하면, 보는 사람의 마음의 작용, 학습된 시각, 경험의 정도…에 따라 사진 속에 찍힌 대상이 모두 다르게 보일 것이고, 사진 작품과 관객이 맺는 관계에 따라 감상의 정도도 제각각이라는 것. 그래서 한정식 작가의 사진 속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있게’ 된 것이다.
유무상생(有無相生)하는 이미지
아무것도 찍혀 있지 않지만, 무엇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이 사진들은 카메라의 광학적 작용과 그곳에 있었던 대상, 공간의 상호침투로 만들어낸 이미지다. 미술사적으로 접근하면 추상(抽象)이라 하겠지만, 단순히 상이 있고 없고(有無)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관계에 의해 새롭게 형성되는, 노자가 이 이미지를 본다면 유무상생(有無相生) 이미지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구상과 추상을, 단어 그대로 풀이하면, 구상(具象)은 상(象)을 갖추는(具) 것이고 추상(抽象)은 여러 부분 중에 하나를 뽑아낸(抽) 낸 상(象)이다. 구상은 추상을 포함하기도 하고 때로 추상이 구상이 될 수도 있는, 둘은 사실 한 몸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대개 구체적인 상이 보이지 않거나, 구상의 반대 항에 추상을 놓지만, 이항 대립적으로 둘을 해석하려고 할 때 언어 프레임에 갇히는 형국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별개일 수 있으나 존재론적으로 둘은 서로 의지, 보충, 보완하며 존재한다.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말과 침묵, 양달과 응달, 빛과 그림자, 흑과 백으로 팽팽한 긴장 관계에 놓여 있는 이미지. 한정식 작가의 텅 빈 이미지는 ‘모든 것의 이미지’로 관객과 함께 공상(空相)하고 공생(共生)하며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는 사진이다.
한정식 작가는 본인의 논문 <추상사진에 관한 연구>(1991)에서 사진의 추상성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사물이 사물로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선이나 면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든지, 사건이 사건으로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성을 떠나 비현실적 상황을 창출하는 경우에 추상 사진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 형태로 재현되어 있다해도, 그것이 구체적 현실의 재현에 목적을 두지 않는 경우, 대상이 그 현실적 의미를 벗어나, 현실도 단순한 형태도 아닌, 제3의 의미로 전이되어 나타나는 경우를 일러 본고에서는 추상 사진이라고 지칭하였다. 즉, 그들 영상이 언어로는 표현 불가능한 어떤 상황, 다시 말해서 ‘언어 밖의 세계’를 시각화해 제시하는 경우 등을 추상 사진의 대표적 경우로 본 것이다.” 여기에서 ‘제3의 의미’, ‘언어 밖의 세계’는 벤야민의 문지방 영역 혹은 제3의 공간, 바르트의 푼크툼 혹은 무딘 의미, 둥근 의미가 연상되는 비유이다. 모두 말 할 수 없는 것과 찍을 수 없는 것, 보이지 않는 것과 볼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은유이고, 그 세계를 사진으로 촬영하면 한정식 작가의 언급처럼 추상 사진이라 할 수 있다. 한정식 작가는 오래전부터 추상 사진을 통해 사진의 한계와 한계 너머의 세계를 동시에 타진했다. 아마도 이번 전시는 작가의 사진 실험과 사진 수행을 새롭게 조명하는 특별한 시간이 될 것이다.
최연하(독립큐레이터, 사진평론가)